제주 4·3 유적지
4·3 유적지 목록
다랑쉬굴
세화리 다랑쉬굴은 1948년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발각되어 희생당한 곳이다. 군경토벌대는 이 굴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고통스게 학살했다.1992년 유해 11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굴이 발견되어 4·3 진상규명 목소리를 드높이는 계기 ...
대정국민학교
제주 4.3 사건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1절 기념행사는 관덕정, 조천, 대정 초등학교(대정 초등학교)에서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제주시까지 가기 어려웠던 대정면민 6.000여명이 모여 이 곳에서 기념행사를 진행하던 중 일부 청년층의 주도로 시위가 이어져 지역 인사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일부 청년층이 남로당이었다는 이유로 당시 ...
도고내가름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4‧3으로 마을이 파괴되기 전까지 양윤표, 강승표 등10여 가호가 농축업에 종사하며 오순도순 살던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도고내가름은 1948년 11월 20일경에 모두 불탔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산에 숨었다가 밤에는 집근처 움막으로 돌아와 살았다. 1949년 봄부터 봉개동 재건 당시 동동네는 재건되었지만 이 마을은 재건되지 ...
도련1구 4•3성
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도련1구는 당시 공회당과 수운교 건물이 있던 곳이 그 부근에서 제일 높다고 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성담을 쌓았다. 1949년1월에 축성이 시작되었다. 유성문(1925년생, 남)의 증언에 따르면 4·3성 주변에 숨을 곳이 없도록 성 근처의 나무까지도 전부 잘랐다.삼양동지에 따르면, 도련1구의 4·3성은 직사각형 형태이고, 다른 ...
도련1동 4·3희생자 위령비
도련1동 4·3희생자유족회는 2007년 2월 5일, 민간인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영령을 위로하며 정부 차원의 4·3의 진상 규명에 적극 참여한다는 목적으로 발족 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2008년 2월에 지금의 장소에 위령비를세우고 제단을 조성했다.4·3위령비를 세운 부지는 도련1동 출신의 제일교포 고희수가 희사했다.그의 송덕비가 도련1동 체육공원 ...
도련2동 4·3송덕비
도련2동 출신의 4·3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하여 2010년 도련2동 주민들이마을회관 마당에 세훈 비석이다.도련2동 부우현은 4·3 당시 다른 마을에 비해 도련2동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우리 마을 사람들은 합심하여 각자 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난세를 극복하여야 한다’라는 내용의 말을 구장(區長) ...
동보서당(동보서숙/동보의숙) 터
제민일보 4‧3취재반에 따르면, 경무부는 3‧1 발포사건 이후 험악해진 제주도의 분위기를 진압하기 위해 1947년 4월 말에 철도경찰을 제주경찰 소속으로 대거 제주도에 내려보냈다. 철도경찰을 해방 직후 ‘운수경찰’로 발족했다. 주요 업무는 역 구내에서 개찰, 임검, 화물검색 등을 담당했다. 그러나이들의 존립 가치가 문제 제기 되던 차에 이들에게 제주 ...
동회천 4‧3희생자 위령비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동회천 마을회에서 2007년 12월, 화천사 옆 40여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조성하였다. 각명비에는 동회천 4‧3 희생자 72명의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문화원연합회 2021, 159)
둘숭이(돌송이)
이곳은 1948년 10월 26일, 김태흥(26, 용강리 출신, 행방불명으로 신고됨),변세경 등 9명이 삼양지서 경찰에 의해 학살된 곳이다. 이들은 삼양지서에 수감되었던 마을 청년들로, 전날 밤 무장대가 삼양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김병규, 노형리 출신)을 학살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당시 지서에 수감됐던 청년들을 집단 총살한 것이다.삼양1동 김하종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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