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적지
4·3 유적지 목록
굴왓
이곳 '굴왓'은 1949년 1월 17일, 이 마을 주민 80여 명이 군인에게 학살당한 장소이다.군인들이 같은날 앞서 북촌리 너븐숭이에서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뒤, 동복리에 들러 주민들을 '장복밧'에 집결시켰다. 장복밧에 모인 주민들을 끌고가 학살한 곳이 바로 굴왓이다. 장복밧은 굴왓에서 일주동로를 넘어 보이는 팽나 ...
낙선동 4·3성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초토화 작전으로 불타 버리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야산에서 생활하거나 해변마을로 소개됐다. 그렇지만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1949년 봄이 되자 낙선동에 성을 쌓고 ...
너븐숭이 기념관
북촌리는 조천읍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제시대 당시 항일운동을 한 선각자들이 많았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그러나 1947년 8월 경찰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마을 포구에서 발생한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 부터 늘 ...
다랑쉬굴
세화리 다랑쉬굴은 1948년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발각되어 희생당한 곳이다. 군경토벌대는 이 굴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고통스게 학살했다.1992년 유해 11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굴이 발견되어 4·3 진상규명 목소리를 드높이는 계기 ...
목시물굴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초토화 된 후 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다 학살된 장소이다. 당시 함덕의 9연대는 11월 25일 선흘곶의 도틀굴에 숨어있던 선흘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음날에는 목시물굴에서 40여 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그후 9연대는 연행자를 고문해 다른 은신처인 인근 대섭이굴과 벤뱅듸굴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들을 길라잡이로 삼 ...
불카분낭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초토화 되면서 선흘리 가옥은 대부분 전소됐다. 이 때 마을 안에 있던 이 팽나무에 불이 옮겨붙었다. 그 후 모두 타버린 줄 알았던 팽나무의 한 쪽에서 싹이 돋았다. 지금도 한 쪽은 죽어버린 상태 그대로 있고 다른 한 쪽은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그 곳엔 다른 나무의 씨(신나무)가 새싹을 틔워 몇 십년을 공생하고 있다. ...
이덕구 산전
1948년 11월 20일 봉개리가 초토화되자 주민들은 인근 야산에 피신하게 된다. 이덕구 산전은 이렇게 토벌이 강화되자 주민들이 집단 피신했던 곳이다. '북받친밭'이라고도 불린다. 피난민들은 봉개리, 용강리, 회천리, 도련리 등의 사람들이었으며, 마을별로 그룹을 이뤄 살았다고 증언자들은 말한다.대부분의 피난 주민들이 귀순한 1949 ...
조천중학원 옛터
해방이 되면서 국민학교와 더불어 중등학교 설립 붐이 일어난다. 조천중학원은 그 시기 다른 지역의 중학원과 마찬가지로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1946년 3월에 설립된다. 교사들은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공부한 인재들이었고 당시 사회 분위기답게 남로당 조직들과 연결되어 있어 대부분이 4·3 가운데 희생된다.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이었던 ...
조천지서 (현 조천파출소)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조천파출소는 제주4·3 당시 조천지서로, 1948년 3월 16일 이곳에서 조천중학원 학생이었던 김용철이 이곳에서 고문을 당해 숨을 거둔 곳이다. 해방 이후 1947넌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28주년 3.1절 기념대회 때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숨지고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총파업으로 진실규명과 책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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