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적지
4·3 유적지 목록
감낭우영(서회천)
큰 감나무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추측된다.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 삼양 주둔 군‧경 토벌대는회천리 지역에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것은 그즈음 벌어졌던 무장대의 삼양지서 습격에 대한 보복토벌 성격이 짙었다. 이날의 토벌은 갑작스레 진행됐기 때문에 주민들은 미처 피신을 하지 못했다. 토벌대가 마을에 진입하자 주민들 ...
강전이굴
제주특별자치도·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이곳은 문병규, 박두일, 문달윤,이창수 등 10여 가호의 주민 50여 명이 살았던 마을이다. 1949년 1월, 멘촌이 소개되면서 불탔다. 몇 개월 후 멘촌이 복구되었지만, 본동과 멀리 떨어져 이 마을은 복구되지 못했다.도련2동 부우현은 강전이굴이 불타기 전에 서당이 2곳 정도 있었다고 했다.32)삼양동지에는 ...
고냉이술궤(고넹이술굴)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1948년 11월 마을을 불태우기 전까지 봉개리 사람들이 군인이나 찰이 마을로 진입한다고 하면 일상적으로 ‘고냉이술게’ 등으로 숨었다. 제주4‧3 유적지 중에 자연동굴은 은신처이면서 학살터가 되기도 하는데,이곳에서는 학살된 사람은 없고, 주민들이 숨었던 은신처로 알려진다.(제주특별자치도문화원연합회 2021, 152)
곤을동
약 70여호로 이루어졌던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것은 1949년 1월 5일과 6일 양일간이었다. 1949년 1월 5일(음 1948년 12월 6일) 오후 3∼4시쯤 군인 1개 소대 40여 명의 군인들이 곤을동을 포위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선 군인들은 곤흘동 집들을 수색하고 돌아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껌벅이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
관덕정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년) 목사 신숙청 때 군사훈련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후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 쓰여졌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 때는 이곳에 제주경찰감찰청 제1구경찰서 뿐만 아니라 제주지방법원과 세무서도 있었다.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 ...
도고내가름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4‧3으로 마을이 파괴되기 전까지 양윤표, 강승표 등10여 가호가 농축업에 종사하며 오순도순 살던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도고내가름은 1948년 11월 20일경에 모두 불탔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산에 숨었다가 밤에는 집근처 움막으로 돌아와 살았다. 1949년 봄부터 봉개동 재건 당시 동동네는 재건되었지만 이 마을은 재건되지 ...
도련1구 4•3성
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도련1구는 당시 공회당과 수운교 건물이 있던 곳이 그 부근에서 제일 높다고 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성담을 쌓았다. 1949년1월에 축성이 시작되었다. 유성문(1925년생, 남)의 증언에 따르면 4·3성 주변에 숨을 곳이 없도록 성 근처의 나무까지도 전부 잘랐다.삼양동지에 따르면, 도련1구의 4·3성은 직사각형 형태이고, 다른 ...
도련1동 4·3희생자 위령비
도련1동 4·3희생자유족회는 2007년 2월 5일, 민간인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영령을 위로하며 정부 차원의 4·3의 진상 규명에 적극 참여한다는 목적으로 발족 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2008년 2월에 지금의 장소에 위령비를세우고 제단을 조성했다.4·3위령비를 세운 부지는 도련1동 출신의 제일교포 고희수가 희사했다.그의 송덕비가 도련1동 체육공원 ...
도련2동 4·3송덕비
도련2동 출신의 4·3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하여 2010년 도련2동 주민들이마을회관 마당에 세훈 비석이다.도련2동 부우현은 4·3 당시 다른 마을에 비해 도련2동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우리 마을 사람들은 합심하여 각자 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난세를 극복하여야 한다’라는 내용의 말을 구장(區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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