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적지
4·3 유적지 목록
삼양지서 옛터
삼양지서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찰관 주재소로 설치됐다. 해방 이후국립경찰의 창립과 동시에 제주경찰서 삼양지서로 발족했다. 1955년 삼양경찰관 출장소로 개칭하였고, 다음 해 폐지했다가 1957년 삼양파출소로 재설치 되었다. 1969년 삼양지서 위치에서 지금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그리고 2019년부터는 삼양파출소에서 삼양지구대로 명칭을 변경하였 ...
새가름(서회천)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동회천과 서회천의 중간에 있는 20여 가호가 모여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1948년 11월 27일 군‧경 토벌대에 의해초토화되었다. 4‧3의 와중에는 이신조(52세), 이임생(30세) 부자를 포함하여10여 명이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소개생활을 하다가 봉개동과 서회천이 재건되어 살았으나 새가름은 재건되지 못했다. ...
석구왓궤(동회천)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석구왓궤는 동회천 마을 사람들이 4·3 초기부터 일상적인 은신처였다. 굴은 윗굴과 아랫굴로 되어있는데, 입구는 작지만 들어가면 방 하나 정도의 넓은 공간이 있었다. 윗굴에는 주로 소년들이 은신했고, 아랫굴에는 어른들이 숨었다. 1948년 12월 1일, 석구왓궤가 토벌대에발각되어 숨어있던 7명은 굴에서 질식사하였다. 굴에서 나오라 ...
소낭굴(동회천)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1949년 2월 4일 새벽, 제2연대는 제주읍 동부8리작전으로 토끼몰이식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오등리 죽성에 주둔했던 군부대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영평, 월평, 용강을 거쳐 봉개리로 포위해 들어왔다또 함덕 주둔 군부대는 삼양지서 소속 대한청년단과 경찰들이 함께 동쪽에서서쪽으로 밀고 봉개리 방향으로 나갔다. 이미 1948년 11월 ...
솔쳉(챙)이왓
제주특별자치도·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이곳은 변윤찬, 김원일, 김기택등 10여 가호의 주민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1949년 1월 멘촌이 소개되면서마을을 불태웠다. 멘촌 재건 당시 본동과 멀리 떨어져 축성을 할 수 없었던이 마을은 복구되지 못했다.삼양동지에 따르면, 예전에 소나무가 울창한 곳이라는 데서 연유하여 ‘솔쳉이’가 되었다고 한다.지금은 대 ...
연미마을회관
1948년 4·28 평화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벌어진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은 진화 국면에 있었던 제주4·3이 더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제주읍 중심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 청년단원들이 대낮에 들이닥쳐 10여 채의 민가를 태우면서 시작됐습니다. 당일 오전 9시경, ...
옥성정 옛터
이곳 옥성정 옛터는 1947년 6월 17일, 당시 11연대 연대장이었던 박진경 대령(진급)의 승진 축하연이 열린 곳이다. 이곳은 당시 제주읍내에서 가장 큰 2층 규모의 요정(料亭)이었다. 축하연에는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참석했다.박진경은 제주 부임 한 달 만에 미군정으로부터 제주 토벌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중령에서 ...
웃무드네 대련수(대룡소)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1949년 2월 4일, 동부8리 대토벌 시 용강 주민들이 토벌대에 쫓기다 희생당한 곳이다. 남쪽에서 포위하고 마을에 들이닥친토벌대를 피해 용강리 사람들은 대련수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시 용강리는 마을 주변 대부분이 밭과 초지로 이루어져 피신할 곳이 많지 않았다.그나마 하천변의 대련수나 당카름 등에 어느 정도 큰 나무와 궤 ...
원지모르
제주특별자치도·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이곳은 문대옥, 이지숙, 고모봉,고태호, 고계환, 고세환 등 10여 가호의 주민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1949년1월, 멘촌이 소개되면서 불탔다. 소개 당시 인명피해는 없었다. 몇 개월 후멘촌이 복구 되었지만, 본동과 멀리 떨어져 이 마을은 복구되지 못했다.삼양동지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등성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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