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적지
4·3 유적지 목록
사리물궤
1948년 11월 7일, 이웃 의귀리, 한남리와 더불어 수망리도 대부분의 가옥이 불탔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토벌대에 마을이 전소되자 주민들은 인근 야산에 움막을 짓거나 궤를 찾아 힘겨운 은신생활을 했다. 하천변에 있는 이곳 사리물궤는 마을에서 비교적 가깝고 주변에 크고 작은 궤가 산재해 있어 주민들이 숨어들기엔 안성맞춤이었다.수망주민들은 마을이 초토 ...
산물낭우영(동회천)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화천사 동쪽 일대로 산귤나무가 많았던 마을의 이름이다. 산물낭우영은 4‧3 당시 김평식, 허신생, 김참봉 등 7가구가 살았던 작은 마을이다. 김평식의 모친과 김참봉의 세 식구가 토벌대에 희생되었다. 1948년 11월 27일 군경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 된 이후 이곳으로 돌아온 사람이 없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문화 ...
삼양교회 옛터
삼양교회는 1918년에 설립되어 교세를 확장해가다가 1949년 1월 3일 4·3사건의 여파로 예배당이 소실되면서 당시의 모든 기록이 없어지고 말았다.1951년에 원래 자리를 신축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한금순 2023, 12)삼양2동 김건의씨45)는 관련하여 이렇게 증언했다.당시 예수를 믿으면 ‘반동(무장대에 협조 하니 않는 주민들)’이라고 불렸고 ...
삼양국민학교
4·3과 관련된 비석은 총 5기이다. 학교후원회가 <고 교장 송문평 순직지지>와<고 급사 송상봉 순직지지>는 1953년에 세웠고, 1982년에는 4·3때 학교가 전소된 후, 재건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주민들의 성금으로<공적비>를 세웠다. 2002년에는 총동창회가 <애국학도 추도비>를 세웠고 ...
삼양지구대 내 순직비석들
삼양지구대 내에는 총 8기의 순직비가 있다. 이 중 4기는 화북지서에서근무하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순직한 경찰 임선길, 최형락, 김장하, 문광준의순직비이다. 원래 화북 주공아파트 어린이 공원에 있던 것을 삼양지구대 내로 옮겨왔다.삼양지서에 근무한 경찰의 순직비 4기의 사연은 이렇다.김병규(26)는 노형동 출신 경찰로 삼양지서에서 근무하다 1948년 1 ...
삼양지서 앞 밭
이곳은 삼양지서에 잡혀 온 주민들이 주로 학살됐던 장소이다. 삼양리 주민뿐 아니라 도련, 화북, 건입, 용강, 봉개까지 삼양지서 관할지역을 넘어서는 지역 주민들까지도 이곳에서 학살을 당했다.제주4·3연구소가 확인한 이곳 희생자들이다.삼양동지에 따르면, 「제주도 4·3피해조사보고서」에 음력 1948년 12월 16일(1949년 1월 26일) 당시 버렁( ...
삼양지서 옛터
삼양지서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찰관 주재소로 설치됐다. 해방 이후국립경찰의 창립과 동시에 제주경찰서 삼양지서로 발족했다. 1955년 삼양경찰관 출장소로 개칭하였고, 다음 해 폐지했다가 1957년 삼양파출소로 재설치 되었다. 1969년 삼양지서 위치에서 지금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그리고 2019년부터는 삼양파출소에서 삼양지구대로 명칭을 변경하였 ...
새가름(서회천)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동회천과 서회천의 중간에 있는 20여 가호가 모여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1948년 11월 27일 군‧경 토벌대에 의해초토화되었다. 4‧3의 와중에는 이신조(52세), 이임생(30세) 부자를 포함하여10여 명이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소개생활을 하다가 봉개동과 서회천이 재건되어 살았으나 새가름은 재건되지 못했다. ...
석구왓궤(동회천)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석구왓궤는 동회천 마을 사람들이 4·3 초기부터 일상적인 은신처였다. 굴은 윗굴과 아랫굴로 되어있는데, 입구는 작지만 들어가면 방 하나 정도의 넓은 공간이 있었다. 윗굴에는 주로 소년들이 은신했고, 아랫굴에는 어른들이 숨었다. 1948년 12월 1일, 석구왓궤가 토벌대에발각되어 숨어있던 7명은 굴에서 질식사하였다. 굴에서 나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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