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시민모임의 평화기행
70년 전 제주민중의 삶 속으로
명혜정님 기행 후기 : 살아남은 자의 몫'을 생각하며 제주를 걷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긴 세월이었던 만큼 수많은 제주 민중들의 당시 삶이 어땠는지 오롯이 전해져 오지는 못했습니다. 굵직한 사건들과 대표적인 인물들로 전해지고, 생존자 분들의 이야기로 당시를 전해듣고 짐작해볼 뿐입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 때의 사람들, 이 곳 제주의 진정한 주인이었던 민중들의 삶으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2월의 첫 날, <전남시민모임>과 함께 이덕구산전을 찾아갔습니다. 이덕구는 제주4·3 무장대의 2대 사령관이었던 인물입니다. 사려니 숲길 사이로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이덕구산전은 무장대의 마지막 결전지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합니다. 산전은 결전지가 아니라 토벌대의 탄압과, 초토화작전에 가까웠던 소개령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제주민중의 산 속 삶의 터전들이었습니다.
한동안 계속 내렸던 폭설로 이덕구산전 가는 길은 무릎까지 눈이 쌓이고 계곡들은 얼어있었습니다. 다니던 길도 온통 눈에 덮여 분간이 어려운 설원에서 길을 이끈 가수 최상돈 씨는 노루의 발자국을 보며 길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차례차례 앞사람이 낸 발자국에 그대로 뒷사람의 발자국을 포개며 앞서 간 이들의 발자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에 참가했던 군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항의하며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지사와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육지의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습니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습니다. 서북청년단은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경찰이 구금자들을 고문하는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 된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를 꿈꿨던 제주민중
1948년 3월 경찰서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세 건이나 발생하게 되고 제주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고문치사로 죽게 된 이들 중에는 조천중학교 교사였던 이덕구가 가르쳤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한라산 중산간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됩니다. 350여 명의 무장대는 이 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 인사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1948년 10월 17일, 잔인하기로 악명높았던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이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소개령은 초토화작전에 가까웠습니다. 토벌대는 11월 중순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중산간 지대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내려온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했습니다.
이로 인해 토벌대를 피해 입산하는 피란민이 더욱 늘었고, 피란 다니다 잡히면 최소한의 어떤 재판 절차도 없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으로 보내졌습니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서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릅니다.
1949년 3월부터 토벌대는 진압작전과 선무공작을 병행합니다.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 중 귀순하는 사람은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고 이 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49년 5월 10일에는 재선거가 치러지고, 이 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됩니다.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민중의 한 사람인 '장두'의 역사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는 1949년 6월에 죽었습니다. 토벌대는 이덕구의 시신을 관덕정에 십자형으로 걸어 전시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예부터 제주에는 폭정에 항거하며 자신의 안위는 초개(草芥-풀과 티끌)처럼 생각하고, 민중의 삶을 위해 싸워온 '장두'의 역사가 이어져왔습니다. 이덕구의 모습에서 장두의 역사를 읽어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주민들의 지지와 지원이 없었다면 7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을 상징하는 곡식들이 모여 장수의 갑옷이 되었지만, 콩 한 알, 팥 한 알이 부족해서 그 빈 곳을 화살에 맞고 죽는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면 오랜 시간 싸울 수 없었을 것
그러나 토벌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 가입자, 입산자 가족 등을 끌고가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집단학살을 저지릅니다.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습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령이 해제되면서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70년을 맞은 지금도 이 사건이 끝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4·3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덕구산전에 도착해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가수 최상돈 씨의 노래 '애기동백꽃의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5월 광주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면, 4월 제주에는 '애기동백꽃의 노래'가 있습니다. 제주 가수 최상돈 씨는 '애기동백꽃의 노래' 등을 만들어 부르고, 10여 년 간 4·3 유적지들을 다니며 음악순례를 해왔습니다.
1. 산에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들판에 붉게 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타다 타다 붉은꽃 되었다더라
2. 님 그리던 마음도 봄꽃이 되어
하얗게 님의 품에 안기었구나
우리 누이 같은 꽃 애기 동백꽃
봄이 오면 푸르게 태어 나거라
3. 붉은 애기동백꽃 붉은 진달래
다 같은 우리나라 곱디고운 꽃
남이나 북이나 동이나 서나
한 핏줄 한겨레 싸우지 마라
4. 애기동백 꽃지면 겨울이 가고
봄이면 산에들에 진달래 피네
울긋불긋 단풍에 가을이 가면
애기동백 꽃피는 겨울이 온다- <애기동백꽃의 노래> 작사 · 작곡 최상돈
4·3 70주년 평화기행을 진행하면서 참가자 분들께 항상 제주4·3을 널리 알려달라고 당부해왔습니다. 이번 기행에서 만난 <전남시민모임>과도 서로 여순항쟁과 제주4·3, 그리고 제주와 광주 모두 연결되어있음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와 부탁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같이 불렀던 '애기동백꽃의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제주의 역사, 여순이나 광주의 역사 나눌 것 없이 모두 우리 민중의 역사인데 말이지요.
"붉은 애기동백꽃 붉은 진달래 / 다 같은 우리나라 곱디고운 꽃
남이나 북이나 동이나 서나 / 한 핏줄 한겨레 싸우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