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시민모임의 평화기행
1일차 : 70년 전 제주민중의 삶 속으로
2일차 : 살아남은 자의 몫'을 생각하며 제주를 걷다
함께 70주년을 맞는 제주4.3과 여순항쟁
지난 2월 1일 전남 시민모임 30여 명이 제주4·3 70주년 평화기행에 참가했다. 대부분이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겪었거나 부모님을 통해서 광주의 기억을 전달받은 사람들이라 제주 4·3항쟁의 의미를 피부로 파악하고 있었고, 피해규모로는 광주보다 피해가 컸던 제주4·3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국가가 저지른 학살! 해안으로 5km 이상의 중산간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좌익이라고 규정지으며 싹쓸이하라는 명령은 미군정과 국가에 의한 학살의 실체를 제시해주는 한 마디였다. 그러나 비단 중산간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해안마을을 포함해 제주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벌은 살벌하게 진행되었다.
평화기행팀은 먼저 눈이 쌓인 사려니 숲을 걸어서 무장대와, 당시 산으로 피란 갔던 주민들이 생활했던 '교래 북받친밭'을 찾았다. 무장대의 사령부였던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했던 곳이기도 해서 '이덕구 산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깊은 산 속에서 추위는 어떻게 피했으며 배고픔은 또 어떻게 달래야 했을지 발걸음마다 그들의 시련과 고통이 느껴졌다.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투표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군정을 등에 업고 제주도민을 모두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이승만정부에 희생되었던 숱한 생명들!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눈길을 걸었다.
정강이까지 쌓인 눈길은 험하고 길어서 이덕구 부대와, 피란민들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과정이기도 했다. 평화기행 참가자는 초등학교 6학년 청소년부터 60이 넘은 분까지 참여했는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해설자를 따라서 고요히 산속을 걸었다.
살아남은 자의 몫을 생각하며 걸었던 하얀 눈길
우리는 광주 항쟁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자의 몫에 대해서 이미 훈련이 되어 있었다. 친구가 죽고, 선배가 죽고, 스승이 죽은 것을 목격하고 나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열패감과 좌절에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 후로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해마다 5월 18일만 되면 조용히 도청으로 모여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때론 구호를 외쳤고 때론 최루탄을 맞았고, 이젠 촛불을 들게 된 것이다.
1980년대의 아픔을 함께 공유했기에 우리들은 사회생활에서도 어떤 비리에 연루되지 않았고 우리들의 영혼을 지키며 30여 년을 살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의 기억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켜서 여순항쟁의 의미를 새롭게 연구하며 진상을 규명해 나가고 있다.
"동포에 대한 학살을 거부한" 군인들
제주도에서 4·3항쟁이 시작되고 경찰만으로 수습이 어렵게 되자 정부에서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도로 가서 제주도민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4연대는 그 명령을 거역한다. 한 민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경찰에게 14연대를 공격하라고 했고, 순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지리산으로 가려던 14연대는 순천에서부터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14연대에 소속된 군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그 대상이 군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색출해서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정확한 단서도 없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낙인찍혀서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여수와 순천, 고흥 그리고 구례, 광양 등에서 여순항쟁으로 죽어간 친척이 없는 가족은 거의 없다.
나도 어린 시절 이웃집 할아버지가 여순항쟁 때문에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연좌제에 묶여서 그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공직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나에게는 삼촌뻘이 되는 할아버지의 아들들은 모두 공부도 매우 잘했지만, 연좌제로 인해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없어서 사업을 해야한다고 했다.
1만여 명이 희생된 여순항쟁
그런데 내가 동학소설을 쓰면서 사료를 조사해 보았더니 인간이 지니는 천부인권을 외쳤던 동학사상의 뿌리가 내 고향 고흥에도 일찍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흥에서 처형된 접주 중에는 명씨 성을 가진 분이 계셨고, 명씨는 주로 내 고향에 살았으니 어쩜 이웃집 할아버지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혈족촌에서 자란 탓에 이웃이 모두 친척들이었는데 그분들 중에서 동학혁명의 희생자도 계시고 여순항쟁의 희생자도 계셔서 가족사에 한 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총살을 당하는 아픔을 겪고도 의연히 삼형제를 키우며 묵묵히 살아가던 이웃집 할머니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은 한번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누구도 그분 앞에서는 여순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의 제삿날이 다가오면 동네 어른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어린 나에게 그 이야기는 무시무시한 공포로 다가오고 그 할아버지가 숨어 지냈다는 초등학교 지하실이 무섭기만 했었다.
제주 사려니 숲에서 내려온 답사팀은 북촌마을의 학살현장을 둘러 보았고, 다음 날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에 갔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죽게 한 곤을동을 돌면서 이렇게 사라져 버린 마을이 한두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 4·3항쟁에 대한 잔인하고 방대한 탄압과 제주도민의 희생을 떠올리니 다시 한 번 가슴이 절절했다. 5·18 묘역에서 느낀 아픔보다도 몇십 배의 희생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화석처럼 깊이 묻혀 있었던 제주도의 역사! 4·3항쟁 70주년을 맞아서 이제 그 아픔이 세상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민족의 통일을 바라던 열망, 인간은 누구나 하늘에서 내린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았던 제주도민에게 가해진 형벌은 가혹했지만, 그 희생으로 결코 헛되지 않았으리라.
가장 먼저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제주도민에게 우리는 뭔가를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진보적인 양반들의 귀양살이 터이기도 했고, 동학혁명에서 실패한 주역들의 피란처였으며 해외에서 일찍이 선진문물을 접한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던 제주도에서는 해방 후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훌륭한 고등교육이 실현되었다. 그래서 제주도민의 감수성과 민심은 오히려 모든 문화의 중심지였던 수도보다 더 높지 않았을까?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고착화 되어버린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 위해서 5·10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제주도민에게 가해진 가혹한 형벌, 그리고 이제 70주년을 맞이한 4·3항쟁은 새롭게 역사의 정면으로 부각하고 있다.
여수와 순천에서도 그동안 여순항쟁의 새로운 조명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민족이 하나이길 원했던 소망을 무참히 밟아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아 버린 정권에 책임을 묻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떠나서 개인의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평화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여순항쟁을 알리는 일에 조직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시민모임을 확대시키고 제주도민이 4·3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여수와 순천에서도 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작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에만 무고한 희생을 그나마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 먼저 가신 이들이 닦아준 민주주의의 토대 덕분에 우리가 오늘을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독재와 압박은 더 길었을 수도, 여전했을 수도 있다.
올해 정초에 참가했던 제주4·3 평화기행은 개인적으로도, 앞으로 남은 생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알려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여수와 순천의 지역 모임에도 더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싶고, 개인의 삶이 역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수시로 제주도를 찾아서 4·3항쟁의 흔적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평화기행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월 1일~2일, 전남시민모임에서 제주를 방문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 4·3 역사의 현장을 돌아본 명혜정 선생님께서 기행 후기를 기고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