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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8월 28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Q. 오늘이 제주4·3유적지 소개 마지막 시간인데요. 마지막으로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은 마지막 시간이니 만큼 그동안의 제주4·3 진상규명 활동과 그 성과, 제주4·3진상규명 활동과 관련된 유적지와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 소개로 방송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Q. 제주4·3이 올해로 73주년을 맞잖아요. 올해 2월에는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되는 결실을 맺기도 했고요. 그래도 제주4·3의 역사에 있어서 뜻있는 한 해가 되겠죠?

A. 그렇습니다. 제주4·3을 기억하는 것조차 금기였던 시대를 지나, 진상규명을 위해 각 분야에서 전개됐던 운동, 많은 이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지난 1999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듬해 법률이 공포된 지 21년 만에 전부 개정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이번에 개정된 제주4·3특별법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에 대해 국가에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있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및 사과, 피해자의 명예회복, 재발방지, 교육은 하나의 묶음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번 제주4·3특별법 개정안에서 희생자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조치는 명예회복의 꼭 필요한 단계라 할 것입니다. 늦게나마 이런 결정이 이루어진 것은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Q. 제주4·3 진상규명 운동이 언제부터 본격화된 건가요?

A. 1949년 4·19혁명 이후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기에서 제주4·3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5.16군사 구테타에 의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진상 규명 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고초를 겪게 되고 제주4·3의 진실은 덮이고 제주4·3은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왜곡과 탄압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4·3 진상규명운동 시작된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4·3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A. 4.19혁명 직후 일어나기 시작했던 진상규명운동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집권하면서 발생한 5.16 쿠데타로 철저히 금기시되어야만 했습니다. 진상규명 활동을 하던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 및 제주대학교 4·3진상규명 7인 동지회 등은 구속되었고, 어렵게 유족회를 구성하고, 세워졌던 백조일손비는 경찰들에 의해 산산조각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인 1978년 <순이삼촌>을 통해 4·3을 세상에 알렸던 현기영 작가님께서는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88년부터 본격화된 진상규명운동은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사가 주도했습니다. 1988년 4·3특별취재반이 구성됐고 1년 여간 취재한 내용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제주신문 4·3취재반의 [4·3의 증언] 연재 시작과 제주4·3연구소 설립 등으로 4·3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Q. 현기영 작가님의 <순이삼촌>이 4·3의 참상을 고발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죠?

A. 그렇습니다.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 작가님의 소설 <순이삼촌>은 4·3의 참혹함을 그대로 나타내어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긴 세월 금기시되었던 4·3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현기영 선생님께서는 그 험악하다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런 고초를 겪고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계신 현기영 선생님께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Q. 이 당시에 유족들은 선뜻 나설 수 없던 시기였죠?

A. 그렇습니다. 당시 유족들을 옭아매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연좌제에 의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조차 할 수 없었고 극심한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국가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모든 흔적을 지워야 했습니다. 당신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4·3의 기억도 지워야 했습니다. 김석범 소설가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우리네 가족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Q. 첫 추모제에서 많은 곤욕을 치렀다고요?

A. 네. 4월 3일을 전후해 각지에서 추모 모임이 열렸고 마당극, 강연회, 문학제 등이 벌어졌는데요. 놀이패 ‘한라산’은 첫 공연 때 담당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등의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문화예술계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있었죠.

Q. 이후 어떤 활동들이 있었나요?

A. 앞선 시간에 소개해 드렸던 유적지 ‘다랑쉬굴’에서 1992년 유해가 발굴되면서 제주4·3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4·3진상규명운동을 가속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 4·3특위가 결성되었고, 1995년에 4·3특위에서 4·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발간합니다. 제주4·3 50주년을 맞은 1998년에는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국내 학계, 노동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예술계, 시민사회단체 등이 대거 참여하는 등 각종 기념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Q.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 4·3특별법이 드디어 공포되었던 거군요.

A. 그렇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많은 노력을 해준 덕분에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요. 2003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습니다. 진상조사단의 권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최초의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해 국가차원의 진상규명 보고서를 채택한 것은 제주4·3이 처음이며 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도 4·3이 처음이라 더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Q. 이후에 보수진영에서 정권을 잡으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잖아요?

A. 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당 의원들이 제주4·3특별법과 제주4·3위원회를 폐지하기 위해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고요. 희생자에 대한 모욕과 끊임없는 재심의 요구와 소송을 제기해 진상조사보고서 파기와 희생자 결정 무효화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제주4·3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지만, 이후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 등이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를 금지해달라며 소송을 내기도 했죠.

Q.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제주도민에게 사과했죠?

A. 그렇습니다. 제주4·3이 2014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뒤 현직 대통령이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건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었는데요. 70주년 추념식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힘쓰겠다고 약속했죠. 2007년에서 2009년까지 진행했던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쪽과 동북쪽에서 발굴된 유해를 10년 가까이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신원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비가 지원됨에 따라 유전자 검사를 통해 비로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Q. 수십 년간 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제주도민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제주4·3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거죠?

A. 그렇습니다. 향후 4·3의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요. 4·3의 정명을 찾는 일을 언젠가는 마무리해야 합니다. 제주4·3이 제대로 된 이름을 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기간이 7년 7개월 동안 길게 진행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다른 사건에 비해 명확하지 않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하게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주4·3을 기억하는 당세대가 돌아가신 후에야 제대로 된 논의가 진행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역할과 책임을 묻기 위한 활동으로 시민사회 단체의 관심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활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꾸준히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Q. 또 어떤 과제들이 있을까요?

A. 배제된 희생자 구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4·3당시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이 희생자로 인정이 되어야 진정한 화해와 상생 그리고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모범 사례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4·3이 마무리된 후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하다가 고초를 겪은 분들과 4·3으로 인해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된 분들에 대해서 피해회복의 조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좀 전에 현기영 선생님이 4·3에 대한 소설을 쓴 것 때문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현기영 선생님을 비롯해 진상규명활동 과정에서 구속이 되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피해를 받은 분들도 당연히 4·3희생자로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트라우마센터를 적극 활용하여 4·3에 대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조사 및 피해회복 조치가 필요합니다. 후유장애의 인정 기준을 4·3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로 보고 있지만, 지금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를 인정한 적은 거의 없고 최근 들어서야 단 한 건에 대해 인정을 했습니다. 정신적인 피해로 인한 희생자의 결정이 보다 광범위하게 인정되었으면 합니다.

Q. 최근 제주4·3 희생자 배·보상 차등 지급 검토로 많은 4·3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A. 4·3배·보상 기준의 하나로 사건 당시의 나이·직업 등에 따라 보상금액을 달리하는 기준안이 검토되고 있는데요. 같은 장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국가 배·보상 금액이 차이가 난다면 또 다른 갈등이 유발될 수 있기에 지역사회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지급방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서 이와 같은 차별지급 방식은 거부하고 일률적인 지급 방식을 제시하라고 입장을 발표하였는데, (사)제주다크투어도 이런 입장에 지지합니다.

Q. 어떤 방식으로 개별 보상금을 산정한다는 건가요?

A. 민사적 피해에 대한 일실이익에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더해서 산정한다고 합니다. 위자료의 경우 지급 액수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손해배상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금액으로 지급될 것인데 금액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관심은 지원액 규모가 클 수밖에 없는 ‘일실이익’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일실이익’은 4·3 당시 희생당하거나 행방불명된 당사자의 당시 평균임금에 취업 가능 기간을 곱한 값에 생활비 등을 공제한 금액으로 지급하겠다는 건데요. 산정의 기준과 방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배·보상 금액의 차이가 클 경우 유족들이 분열할 수 있는 데다 개별적으로 당시 소득을 입증해야 해서 국가폭력 사과와 명예회복이라는 4·3특별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부는 피해자 유족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희생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국가 배·보상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1989년 처음으로  4·3추모제가 열린 제주시민회관. 곧 철거될 예정이다.
1989년 처음으로 4·3추모제가 열린 제주시민회관. 곧 철거될 예정이다.

Q. 네. 무엇보다 희생자 입장에서 실질적인 보상 기준이 마련되어 곧 현실화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현대 역사의 현장인 제주시민회관이 곧 철거된다고요?

A. 네. 내년부터 철거 작업이 시작된다고 하는데요. 제주시민회관은 단순히 낡고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집단기억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요. 1989년에 처음으로 4·3추모제가 열린 곳이 시민회관이거든요. 이외에도 각종 연극,영화 상영, 예술제 등을 통해 4·3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곳입니다. 원래 계획이었던 일부 보존·리모델링에서 전체 철거로 계획이 바뀌었거든요. 시민회관에서의 4·3진상규명활동에 대한 기억이 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과거를 완전히 없애기보다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간이 사라지면 거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에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Q. 4·3 진상규명 활동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지가 또 어떤 것이 있나요?

A. 북촌마을에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습니다. 당시 금기의 역사였던 제주4·3이 현기영 작가님의 소설인 ‘순이삼촌’을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죠.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이 북촌마을입니다. 순이삼촌의 이야기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촌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고, 가족사이기도 하고 또한 마을의 역사이기도 하죠. 북촌마을을 방문하시게 된다면 순이삼촌의 발자국을 찾아 북촌마을을 걸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북촌 너븐숭이 일대에 세워진 순이삼촌 문학비.
북촌 너븐숭이 일대에 세워진 순이삼촌 문학비.

Q.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 소개를 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결성되었나요?

A. 작년 11월, 우리 단체에서 제주도 내 다크투어 유적지 100곳에 대한 유적지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는데요. 보고서에는 안내판이 부재한 곳, 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하더라도 내용이 부실한 곳들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이에 따른 개선방안 등을 담은 보고서입니다. 올해는 해당 보고서의 후속사업으로 보고서에서 지적된 문제점들을 시민들과 함께 해결해 나가는 시민참여 캠페인을 진행해서 실제로 변화를 끌어내고자 결성하게 됐고요. 지난 5월 활동 모집 후 6월부터 시민지킴이단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Q. 제주4·3유적지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꾸려진 거네요? 현재 몇 분 정도 활동에 참여하고 계신 거에요?

A. 현재 지킴이단원은 총 13명이고요. 우리 단체를 후원해 주시는 열렬 회원분도 계시고, 유적지 답사에 참여하셨다가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며 지원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또 참가자 분들 중에 자녀분과 함께 지원해 주신 분도 계시는데요. 지원동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올해 4월에 선친의 유품에서 발견한 4·3유족증을 보고 본인이 유족인 걸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대학생인 자녀에게 학교 측에서 4·3유족대상 장학금 신청 안내문자를 받고 아빠의 유품인 유족증이 계속 떠올랐고, 4·3 때 희생되신 분이 친할머니의 아버지께서 북촌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말씀해주신 할머니께서는 여전히 4·3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두려워하시는 걸 느꼈고 이런 과정들 속에서 4·3유족으로써 4·3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신청하게 됐다고 말씀해주신 게 기억에 남네요.

지난 6월 22일,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첫 모임이 열렸다.
지난 6월 22일,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첫 모임이 열렸다.

Q. 그럼 제주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은 어떤 활동들을 하시는 건가요?

A. 제주다크투어에서 발간한 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유적지 100곳 중 역사적 중요성을 볼 때 안내판 설치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곳이나 보존의 시급성이 요구되는 유적지 총 10곳을 선정하여 이를 알리는 시민참여 캠페인입니다. 현재까지 두 번의 사전 모임과 두 번의 유적지 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앞서 가진 사전 모임에서는 참여한 시민들이 자신이 맡은 유적지를 직접 조사하고 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은 직접 조사한 유적지들을 답사하며 미리 내용을 구성한 안내판을 유적지에 가져가 ‘인간 안내판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이러한 활동들을 정리해 카드뉴스, 동영상, 활동 후기 등으로 만들어 언론 기고, 단체 SNS 계정과 홈페이지에 올리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 내용을 공유해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제주공항 활주로가 내다보이는 공항동산 근처에서 답사를 진행했다.
제주공항 활주로가 내다보이는 공항동산 근처에서 답사를 진행했다.

Q. 유적지 10곳의 답사가 끝나면 지킴이단의 활동은 종료되는 건가요?

A. 10곳의 유적지 현장답사가 끝나면 최종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인데요. 보고서에는 유적지 10곳에 대한 소개 및 선정 기준, 시민지킴이단의 모든 모니터링 활동 내용, 유적지 보존 실태 그리고 개선방안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지킴이단 프로젝트는 올해가 끝이 아니고요 연속사업으로 계속 추진할 예정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지킴이단 추가모집 계획은 없고요. 내년에 상황을 보면서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나 SNS를 통해서 단원을 더 모집할 생각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주다크투어 뉴스레터 구독 또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계정을 팔로우 해주시면 관련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공항에 인접한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공항에 인접한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Q. 4·3유적지 지킴이단의 활동이 대중의 관심을 불러 모아 유적지 안내판이 얼른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앞으로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세요?

A. 제주4·3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알려 나가기 위해서는 이 같은 유적지들이 더 잘 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행정적인 차원에서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시급하다고 생각하고요. 유적지들이 오래오래 유지되려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데요. (사)제주다크투어가 시민참여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도 시민들 스스로가 유적지를 지키는 주체가 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제고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끝으로 더 하고 싶은 말씀은요?

A. 6개월 동안 제주4·3현장과 사연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제주4·3을 이해하고 관심 갖는 데 도움이 되셨기를 기대합니다. (사)제주다크투어는 앞으로도 제주4·3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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