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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 격주 화요일 18:05 만나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 제주다크투어 대표가 출연합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 격주 화요일 18:05 만나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 제주다크투어 대표가 출연합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4월 28일부터 격주 화요일 18시 5분 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를 통해 제주4·3 역사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에서 유명 관광지, 소설이나 영화를 중심으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4·3 역사를 소개합니다. 4·3역사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 <제주4·3유적>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격주 화요일 18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7.9MHz, 서귀포 97.1MHz에서 만나요!

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나요?
A. 오늘은 제주4·3 중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진행된 초토화시기 이후, 수많은 제주도민을 수용했던 ‘제주주정공장’의 역사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Q. 건입동, 제주항 바로 앞에 있었던 역사현장을 말하는 거죠?
A. 네. 제주건입현대아파트가 들어선 곳부터, 그 아래 제주항여객터미널 건너편 일대가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건립한 주정공장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신한공사라는 이름으로 관리되었다고 하네요.

Q. 주정이면, 고구마로 만드는 것인데요. 일제강점기에 이걸 무엇에 쓰려고 큰 공장을 만든 건가요?
A. 고구마를 발효시키면 에탄올이 추출되는데요. 이 에탄올이 특정 발효법 공정을 거치면, 군용기 연료로 쓸 수 있는 부탄올과 군수품 제조에 필요한 아세톤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Q. 근데, 당시 일본에서는 왜 주정으로 만든 연료가 필요했나요?
A.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정쟁이 길어지자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남방작전’을 계획하며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점령하려 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전면적인 석유 금수조치를 내렸어요. 일본군의 군용 석유 8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해왔던 터라 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게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사이 전쟁이 필요한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제주도에 대규모 주정공장을 건설하였습니다.

Q. 그러다가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죠.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제주도에는 4·3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에 주정공장은 어떤 용도로 쓰이나요?
A. 당시 표현으로 ‘폭도’로 의심되는 제주도민들을 잡아 가두는 수용소로 이용되었고, 일부 공간은 도민들을 심하게 고문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특히, 국가 공권력에 의해 가장 많은 인명 살상이 벌어지는 초토화 시기 이후, 군이 선무공작(자수)을 펼치면서 많은 제주도민들을 수용하던 공간이 됩니다.

Q. 당시 토벌대는 왜 선무공작을 진행했나요?
A.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325-326쪽)에 따르면,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가 거의 궤멸됐다는 상황인식에서 비롯되었어요. 당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유재흥도 제주도를 살피고 서울에 올라가서 이렇게 발언합니다.

폭도 중에 진짜 공산도배라는 것은 극히 적고 무지로 휩쓸리어 들어간 자가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귀순시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325-326쪽

또한 북제주군 2개의 선거구만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던 5·10선거를 재실시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하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도 해체하며 도민들을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Q. 그럼 선무공작으로 자수한 제주도민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A. 추운 겨울이었던 초토화시기 제주도민들은 소개 명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내려가도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대살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해안마을보다는 한라산 등지에 숨는 것으로 선택이 늘게 됩니다. 한겨울을 산 속에서 숨어지내다 보니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렵고, 추위까지 겹쳐 어린아이들이나 병환자들은 산속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고, 결국 토벌대에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5월 11일 주정공장을 방문한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의 시찰 보고에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수용소에는 2,000여 명의 수감자가 오래된 창고에서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여성 수가 남성보다 대략 3배나 많았고 팔에 안긴 아기들과 어린이들도 많았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57쪽

당시 주정공장 직원의 증언도 있습니다.

주정공장 언덕 위에 있는 절간고구마 저장 창고에서 같은 마을 사람들을 봤는데, 그냥 마을에 살다가 체포된 것이지, ‘폭도’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57쪽

제민일보에서 취재한 <4·3은 말한다>에 소개된 증언 중에 고난향 할머니가 주정공장에서 겪었던 일은 더욱 참혹합니다. 고 할머니의 남편은 당시 일본에 있었지만 토벌대는 “남편을 찾아내라”며 모진 구타를 했습니다. 당시 19살인 큰아들이 피신한 것도 할머니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42살의 나이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듬해 봄 하산했으나 주정공장에 갇혔다가 육지형무소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주정공장에 수감돼 있을 때는 너무 배가 고파 얼른 징역이라도 보내주면 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고난향!’하고 부르기에 달려갔더니, ‘고난향은 이미 석방됐다’는 겁니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전주형무소에 가니 소장이 말하길 ‘당신은 사무 착오로 여기 온 것같다. 형량이 2~3년쯤 되면 풀어주겠지만, 형량이 10개월 뿐이니 여기서 수양이나 하다 가라’고 했습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형무소에 갈 때 막내아들(5살)을 데리고 갔었는데, 그 안에서 병들어 죽었어요. 또 출옥해 보니 셋째아들(13살)이 사고로 이미 죽었더군요. 피신했던 큰아들도 결국 토벌대에게 붙잡혀 죽었는데 며느리가 유복자를 낳았습니다. 전에 토벌대 놈들이 며느리 배 위에 긴 나무를 얹혀 그 위에 걸터앉아 ‘네 서방 찾아내라’며 고문을 했었는데 그 뱃속에서 손자가 무사히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 제민일보 취재반, 4·3은 말한다

고할머니의 며느리 문순선씨도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셨어요.

연미마을을 불태운 후 우린 오라3구 구아랑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곧 그곳도 불태우자 갈 곳이 없었지요. 또 남편이 사라진 집안은 위험했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열안지오름 부근까지 올라 숨었습니다. 난 주정공장에 수감 중에 유복자를 출산했습니다. 물조차 그리웠던 수감생활이었는데 아기를 낳고 살아온 걸 보면 사람 목숨이 질긴 거란 생각이 듭니다. 당시 20대 남자들은 재수좋은 사람 일부를 빼고는 거의 다 죽었어요. 처음부터 잘했으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텐데 무조건 두들겨패고 쏘아대니 이리저리 쫓겨 도망다니다 죽은 겁니다. 너무도 억울한 희생들입니다.
- 제민일보 취재반, 4·3은 말한다

Q.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 것이 당시 선무공작의 내용이었는데, 실제로도 대부분은 풀려났나요?
A. 여성이나 아이, 노인들은 대부분 풀려나 살던 마을로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젊은 남성들 대부분은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형무소에 보내지거나, 집단 총살 당했습니다.
당시 주정공장에서 취조를 담당하였던 경찰관의 증언입니다.

육지에서 온 경찰들은 고문을 많이 했어. 고문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어떤 경찰은 여자들 옷을 다 벗겨서 천장에 매달아서 고문했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57쪽

경찰은 수감자들에 대해 갖은 고문을 실시하여 무장대와의 연관성을 억지로 자백하게 하여 조서를 작성하여 군에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Q. 초토화 이후, 선무공작때에만 주정공장이 쓰인건가요? 이후에는요?

A. 지난 방송에서 소개드렸던 ‘예비검속’희생자들도 이곳 주정공장에 갇혀있었어요.
제주항 부두 파견 헌병대에서 경비 근무를 했던 장시용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8월 4일 밤 9시경에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하여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배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당시 해병대 군무관으로 근무하던 박춘택과 제주항에서 화물선박을 출항시키던 김인평씨도 주정공장에 수감되어 있던 상당한수의 예비검속자를 해군 경비정에 태우고 가서 수장시켰다고 증언을 남겼습니다.
강태중은 1950년 7월말에 예비검속되어 8월경에 제주읍 주정공장 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요. 그는 그곳에서 살아 남은 3명의 수감자들을 만났는데, 두 군데 창고에 가득 차있던 예비검속자들을 윗도리를 벗기고 뒤로 포승을 채운 채 끌고 나가는 장면을 그들이 목격했다고 합니다.

Q. 주정공장 말고도 제주도민들이 많이 수용되었던 다른 공간이 더 있나요?
A. 당시 하산자들의 수용 장소는, 제주읍내의 경우 주정공장(동척회사) 창고가 가장 컸으며, 그밖에도 농업학교, 일도리 공회당, 용담리 수용소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서귀포에는 정방폭포 위 감자공장과 천지연 부근의 창고가 수용소로 활용되었습니다.

Q. 지금은 주정공장이 있던 자리에 관련 역사관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A.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이 2023년부터 개관하여 역사교육 현장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습니다. 상주하고 있는 무료해설사도 있고, 주정공장수용소의 다양한 역사를 영상과 전시를 통해 알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습니다.

Q, 매년 진혼제도 거행되나요?
A. 매년 4월 2일, 역사관 앞 추모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진혼제가 봉행됩니다. 일반 시민들도 참여가능합니다.

일제강점기 전쟁 연료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제주4·3 역사에서 많은 제주도민을 가두고, 고문했던 수용공간으로 이어지는 이곳의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사관도 마련되었으니 기회가 되시면 방문하셔서 이곳의 아픔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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