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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5월 29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

제주도 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 성산일출봉 일대에도 제주4·3 당시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제주 성산일출봉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꼭 한번은 방문한다는 성산지역에 있는 유적지 두 곳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소개해 드릴 유적지는 ‘터진목’입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에 성산지역 4·3희생자위령제가 봉행 되는데요. 참석할 때마다 성산일출봉과 해변이 어우러진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끼곤 합니다. 동시에 70여 년 전 당시에 끌려와서 총구를 바라보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던 사람들은 그 풍경을 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생각을 하곤 합니다.

Q. 성산 역시도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제주4·3의 역사가 감춰져 있었군요?

A. 제주지역 대부분의 관광명소가 4·3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 성산포 지역도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성산읍 고성리에 위치한 드넓고 아름다운 광치기해변의 끝자락에 있는 터진목도 70여 년 전에는 통한의 피눈물이 흘렀던 곳이라 할 것입니다.

Q. ‘터진목’이 어떤 뜻인가요?

A. ‘터진목’이라는 지명은 ‘터진 길목’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목’은 성산읍 고성리에서 성산리로 들어가는 곳을 가리킵니다. 이곳은 원래 썰물 때는 드러나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고 밀물 때는 잠겨서 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1940년 초에 행정당국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돌로 메우고 도로를 내어 성산과 고성이 완전히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제주4.3유적지 터진목에 대한 설명이 담긴 표석
제주4.3유적지 터진목에 대한 설명이 담긴 표석

Q. 4·3 당시 터진목이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다면, 지리적 여건상 외부인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았고, 또 해안마을이기 때문에 중산간 마을보다는 피해규모가 크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A. 4·3 발발 초기에는 한 번의 지서 습격이 있긴 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 이후로도 무장대(인민유격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받지 않았다고 토벌대에 의한 희생도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948년 포고령이 내려지면서 피해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특히 1948년 겨울에는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서북청년단은 성산지역 주민들에게 악몽의 그림자였다고 합니다.

Q. 지역에 서청이 주둔했다는 건 주민에 대한 만행과 학살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A. 그렇습니다. 당시 약 100여 명의 서북청년단이 주둔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요.

서북청년단은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당시 성산면사무소에 옆에 있던 주정공장 창고에 주민들을 붙잡아 와 수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매일 같이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Q. 4·3 당시 성산지역에 있던 주민들 모두 성산국민학교에 끌려가거나 터진목에서 학살을 당했던 건가요?

A. 대다수가 그랬다고 합니다. 당시 주민들은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성산지역 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Q. 해안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던 건, 서청의 주둔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거군요?

A. 전 시간에 서북청년단이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면서도 급료를 받지 않아,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기도 하고 무전취식을 하면서 주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시기에 서청은 완전히 무장한 군인의 모습으로 성산지역에 주둔했던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죽음과 마주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Q. 서청의 만행을 알 수 있는 사례를 하나 말씀해 주신다면요?

A. 터진목에서 학살이 자행되던 당시,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연행됐던 사람들이 취조 결과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으나, 서청이 다시 연행해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민들에게 이승만 사진이나 태극기 등을 강매할 때 사진을 구매하지 않아 자신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들을 엉뚱한 구실로 학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증언자가 ‘당시 서청은 거꾸로 매달아 끓는 물을 코에 붓거나 불에 달군 쇠로 지져대는 고문으로 강제자백을 받아내 학살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서청의 횡포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정도로 참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터진목 입구 4.3유적지 안내판
터진목 입구 4.3유적지 안내판

Q. 그렇군요. 4·3 당시 서청의 횡포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것 같습니다.

성산지역 주민 외에도 근처 구좌면 일대 주민들도 터진목에 끌려가 학살당했다고 하셨는데요. 터진목에 끌려간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터진목에 끌려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터진목에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주민의 숫자만 19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당시 성산면 전체 희생자는 4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터진목은 이 지역의 일상적인 학살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3 때 10대 소년이었던 한 유족 어르신은 오후 4시쯤 되면 모래판(터진목)에서 “타다닥” 콩 볶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총소리였다고 저희에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학살의 주체는 군인으로 신분이 격상된 서청 특별중대였고, 경찰은 이를 도왔습니다.

Q. 그렇군요. 제주다크투어에서 작년에 성산지역 4·3유족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었다고 들었는데요. 기억에 남는 증언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A. 인터뷰를 진행했던 어르신분 중에 4·3 당시 17개월이었던 분이 계시는데요. 어르신의 아버지는 경찰이셨는데 사직을 하신 후에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고, 남아 있던 어머니와 어르신(당시 생후 17개월)이 군인에게 잡혀갑니다. 어르신(당시 생후 17개월)은 어머니 품에 안겨 터진목에 끌려가서 어머니 품에 안긴 상태에서 총탄을 맞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어르신(당시 생후 17개월)은 어머니 품에 안긴 채 총탄 세 발을 맞았는데 그때 그 흔적이 팔목과 가슴에 남아있었습니다.

Q. 총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건가요?

A. 당시 생후 17개월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총을 맞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경찰관이 재차 총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총격을 가해도 죽지 않자 ‘아 이놈은 죽여서 안 될 놈이다’라는 생각을 해서 한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맡아 키워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주머니께서 아이를 데려다 키우셨고 생전 경찰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경찰들이 어르신을 키워준 보모를 도와준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나중에 할아버지를 찾게 되었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현재 74살의 노인이 되셨습니다.

프랑스 작가 J.M G.LE Clezio의 기행문이 담긴 표석. 표석 뒤로 성산일출봉과 바다가 보입니다.
프랑스 작가 J.M G.LE Clezio의 기행문이 담긴 표석

Q. 살아남아 돌아오셨지만, 어르신에게 4·3은 평생 몸과 마음을 괴롭혔을 것 같네요.

A. 그렇습니다. 터진목 학살 현장의 하나뿐인 생존자가 된 어르신은 당시 생후 17개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로 했던 때에 당시 이념이 뭔지나 알았을까요? 말도 안 되죠. 어르신이 하신 말씀 중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그 성산포 터진목에 총 맞으러 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걸어가다가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날 때가 있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몇 년 전에 터진목 4·3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행사가 있어서 같이 자리한 적이 있었는데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긴 그 눈동자를 잊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마음의 상흔은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르신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그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Q. 그렇군요. 성산 지역 역시도 4·3의 광풍을 빗겨나가진 못했네요. 현재 터진목에서 벌어진 상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A. 터진목 일대에 안내판이 여러 개 세워져 있습니다. 성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4·3유적지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서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는 마을별 희생자 명단을 확인할 수가 있고 추모의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령비가 있는 언덕 동쪽에는 학살했던 현장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해변쪽으로는, 2008년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J.M G.LE Clezio씨가 썼던 기행문이 표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가실 때 읽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Q. 비교적 안내판 정비가 잘 되어 있군요?

추모공원으로 조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라 신경을 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해변가에 있는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는 사람이 죽어간 내용이 있지만, 학살의 주체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석에 학살의 주체를 표시하고, 내용을 기술할 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육하원칙에 맞게 기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기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인 만큼 외국어 안내문을 넣는 등 내용을 보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점은 이곳이 모래로 된 해변이라 이동약자 접근이 어려워 보였고, 안내판마다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제주의 아픈 역사에 대해 더 알고 공감할 수 있도록 미비한 부분들을 하루빨리 개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프랑스 작가 J.M G.LE Clezio의 기행문이 담긴 표석
프랑스 작가 J.M G.LE Clezio의 기행문이 담긴 표석

Q. 두 번째로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두 번째 유적지는 제주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해돋이 명소 성산일출봉에 있는 우뭇개동산입니다.

Q. 해돋이 명소인 성산일출봉도 역시나 4·3의 아픔이 묻혀 있군요?

A. 예, 맞습니다. 제주의 동쪽 끝에 있어 새해 벽두가 되면 수많은 해맞이 인파가 몰리는 성산일출봉입니다. 지금은 성산일출봉의 주차장으로 대부분 정비되었고 잔디광장으로 잘 정비가 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어른들 사이에서는 ‘우뭇개동산’이라고도 불리는 성산일출봉에서도 4·3 당시 20여 명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Q.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A. 저희가 인터뷰했던 현춘홍 할아버지의 증언과 <4·3은 말한다>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위 ‘다이너마이트 사건’ 또는 당시 말로 ‘던지기약 사건’이라 불렸던 집단학살은 1948년 12월 29일 성산면 오조리에 갑자기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서 시작됩니다. 이 사이렌은 토별대가 주민들을 집합하도록 하는 일상적인 신호였습니다. 주민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마을 공회당(회관)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의 군인들이 주민들 중 화약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을 분류해 성산포 인근 감자창고로 끌고 갔습니다. 집합에 늦은 노약자 등도 함께 감자창고로 데려갔습니다.

Q. 예전과 다른 군인들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A. 1948년 12월은 기존에 제주에 주둔해 있던 9연대가 2연대로 교체되는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맞닥뜨린 군인은 이제까지 보아온 9연대 군인이 아닌 새롭게 배치된 2연대 군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낯이 익은 얼굴들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사설 단체인 서북청년단원들이 2연대 군인으로 신분이 변신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Q. 마을을 통제하는 군부대가 바뀌었다. 뭔가 사건이 일어난 조짐처럼 보이는데요.

A. 끌려간 주민들은 며칠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9년 1월 2일 성산일출봉에서 군 토벌대에 의해 집단학살 당합니다. 희생자는 마을 이장, 민보단장 등 20여 명이었습니다. 이 ‘다이너마이트 사건’은 제주에 새로 배치된 군 토벌대가 주민들이 다이너마이트로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빌미로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사실 이 학살사건은 얼핏 봤을 때 주민들이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더 엄밀하게 보자면 새롭게 제주에 파견된 군인들이 지역에 대한 몰이해가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인과 서청이 '다이너마이트 사건'을 빌미로 주민들을 총살한 우뭇개동산
군인과 서청이 '다이너마이트 사건'을 빌미로 주민들을 총살한 우뭇개동산

Q. 지역에 대한 몰이해가 발단이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A.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것을 주민들이 고기잡이용으로 사용을 했었습니다. 4·3이 발발한 후로는 마을 경비 차원에서도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 1948년 겨울부터 각 마을마다 민보단 등을 꾸려 다이너마이트를 무장대의 공격에 대비하는 경비용으로도 사용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사실상 9연대가 있을 때부터 이미 사용이 용인되었던 것입니다.

Q. 다이너마이트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군요.

A. 네, 그렇습니다. 현춘홍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오조리에서는 다이너마이트를 다섯 개씩 구비해 보초를 섰다고 합니다. 저녁에 보초 근무에 들어갈 때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초소에 갔다가 새벽이 되면 그걸 다시 갖고 민보단 본부에 가서 반납했다고 합니다. 또 초소마다 경비작전을 책임지던 초소장은 다이너마이트를 던질 수 있는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오조리 마을에는 5개의 초소가 있었는데 다섯 개 초소에 배치된 초소장이 모두 고기잡이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던 선주였다고 합니다.

Q. 9연대가 철수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잘 전달해주지 않아서 어처구니없게도 소중한 목숨 수십이 희생된 것이네요.

A. 네, 그렇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배치되는 9연대가 제주에 들어오는 2연대에 인수인계를 확실히 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현춘홍 할아버지는 한탄하셨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가 또 다른 증언을 찾았습니다. 애초에 학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의 증언이었는데요.

Q. 네, 어떤 증언이었나요?

A.제민일보 4·3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 5권에 실린 내용인데요. 오조리 마을 민보단장도 이 당시에 희생되었는데, 서청 출신 2연대 군인이 예전에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민보단장을 죽이려고 억지로 죄목을 붙여 학살했다는 내용의 증언이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로 인한 오해 혹은 인수인계의 부재가 아니었어도 학살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증언이었습니다. 또 주민학살이 무차별로 이루어진 것은 2연대의 실적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Q.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주민을 학살 했다고요?

A. 9연대 군인들에 의해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미 희생이 되었는데도 무리하게 주민을 잡아들이고 총살한 것은 9연대를 이어받은 2연대의 과도한 경쟁의식도 한몫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9연대 하에서 묵인되었던 것들이 2연대가 오면서는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Q.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학살의 실체적 진상을 밝히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A.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 않은 상황입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의 많은 증언을 통해 주민학살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만, 구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서는 주둔했던 2연대와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특별중대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시 4·3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했던 집필위원들의 조사 권한이 많이 모자라 이 부분에 대한 강제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70여 년 전 이곳에서 20여 명의 주민이 자기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에 의해 학살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Q. 우뭇개동산은 정확히 위치가 어떻게 되나요? 현재는 어떤 상황이죠?

A. 우뭇개동산은 성산일출봉 매표소에서 북쪽 샛길로 나가면 보이는 무대와 잔디광장 일대입니다. 성산일출봉 북쪽에 있는 우뭇개 포구로 향하는 곳에 위치한 야트막한 동산입니다. 현재는 4·3 당시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은 물론이고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산일출봉은 연간 백만 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찾는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70여 년 전 4·3 당시 주민들이 학살당한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장소입니다. 성산일출봉은 찾는 분들이 이곳에 얽힌 역사에 대해 더 알고 공감할 수 있도록 안내판의 설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또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만큼 외국인들을 위한 외국어 안내판도 필요합니다. 아울러 안내판은 이동약자들을 위해 접근성이 좋은 위치에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성산일출봉은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조치 조정에 따라 이용 인원을 제한하여, 하루 1,200명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방문 전에는 전화 등을 통해 이용 방법을 미리 확인하고, 마스크 착용, 입장 전 발열체크, 참석명부 작성 등 방역수칙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군인과 서청이 '다이너마이트 사건'을 빌미로 주민들을 총살한 우뭇개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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