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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5월 22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신동원 시민참여팀장

도두봉 정산에 생긴 이른바 '키세스존' 포토존
도두봉 정산에 생긴 이른바 '키세스존' 포토존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 소개해 드릴 유적지는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두봉이라는 곳입니다. 도민분들에게는 꽤 익숙한 장소일 텐데요.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일명 ‘키세스존’이라는 포토존으로 유명해지면서 도외에서 오신 분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73년 전인 1948년 5월 20일 이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도두봉에서 일어났던 비극에 대해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Q. 우선 도두봉이 있는 도두리가 4·3 당시 어떤 마을이었는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면 좋을 듯한데요?

A. 네, 제주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해안마을인 도두리는 4·3 당시 도구 1구와 도두 2구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전체 50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제주공항이 확장되면서 마을 규모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도두리에서는 특히 4·3 발발 직전까지도 좌익청년단체와 우익청년단체 간에 주먹다툼이 있을 정도로 마찰이 잦았다고 합니다.

Q. 4·3 발발 후 마을 분위기는 어땠나요?

A.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도두리는 앞서 지난 5월 1일에 소개해 드렸던 제주시 오라리처럼 좌익청년들의 힘이 강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원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제주읍내 등지로 피신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5·10 단독·단정 선거 반대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습니다. 선거를 반대하는 삐라(전단)도 뿌려졌다고 합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도두리에서도 마을 주민 90% 정도가 선거 이틀을 앞두고 좌익청년들이 주장하는 단독·단정 선거 반대에 호응하며 인근 산으로 피신해 선거를 보이콧했다고 합니다.

Q. 마을 분위기가 꽤나 과격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주민들이 양 진영 사이에서 고초를 겪었을 것 같은데요?

A. 네, 도두리는 4·3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해 170여 명이 희생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좌익청년이나 무장대(인민유격대)에 의한 인명 피해도 30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양측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던 것입니다. 4·3의 전개 과정에서 90% 이상의 인명 피해가 토벌대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무장대 측에 의한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도두리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Q. 어떤 일이었나요?

A. 도두리 좌익청년들이 5·10 단독 선거를 전후해 약 열흘 사이에 선거관리위원과 대청단원, 그 가족 등 12명을 잇달아 살해한 것입니다.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아홉 살 난 어린이도 포함돼 있어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입은 인명피해에 대한 책임에서 좌익청년들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

Q. 군경 토벌대에 의한 피해는 없었나요?

A. 이외의 거의 대다수의 피해가 토벌대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극의 시작은 5·10 단독 선거가 끝난 이후인 5월 20일에 벌어졌습니다. 이날 오후 1시쯤,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으로 이뤄진 토벌대 100여 명이 총을 들고 도두봉으로 포위 진격했습니다. 도두봉 위에서 토벌대가 나타나면 경고 나팔을 불어 사람들에게 위험 신호를 전하던 빗개(보초) 소년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소년은 재빠른 다리 덕분에 토벌대의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Q. 그렇다면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인가요?

A. 아닙니다. 허탕을 친 토벌대는 도두리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도두 1구에서만 최소 5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주민 중 한 명의 품에서 삐라가 발견됐는데요. 이 주민은 도두봉 정산으로 끌려가 토벌대가 소지한 일본도로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담배를 말아 피우기 위해 갖고 있던 종이였다는 항변은 묵살되었다고 합니다.

Q. 주민 피해가 또 있었나요?

A. 네, 그렇습니다. 같은 날 비극은 또 일어납니다. 학살이 벌어지던 당시 도두 앞바다에서 오징어를 잡던 배가 표적이 되었던 것인데요. 자신들의 ‘빗개(보초) 소년 검거 작전’이 허탕을 친 화풀이인지 토벌대는 도두 앞바다에 떠 있던 오징어잡이 어선 2척에 경고 사격을 가해 배를 뭍에 대도록 했습니다. 어부들은 겁을 먹고 오징어를 갖다 바쳤습니다. 토벌대는 그 오징어를 먹다가 어부 5명을 도두봉 중턱으로 끌고 가서 잔혹하게 살해합니다. 어부 중 한 명은 등 뒤에 4발의 총알이 박히고 칼로 난자당한 상처를 입고도 생존해 집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얼마 안 있어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 마을 청년들이 산으로 도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Q. 참혹한 일이 단 하루 사이에 벌어졌네요. 1948년 5월경이면 토벌대의 학살이 일상화되기 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후 주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A. 주민들은 이 억울한 죽음들에 대해 경비대 쪽에 진정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토벌대는 희생자들에게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합니다. 제민일보 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증언자가 토벌대는 ‘도두리에서 배 타고 나가 이북에 무전 치던 놈들은 잡았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놓고 어물쩍 넘어가 버리는 식인 것이죠.

Q. 이후 도두리는 어떻게 되나요?

A. 주민들은 이 사건 이후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는 시기인 1948년 11월까지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여느 마을처럼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주민들의 인명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됩니다. 이후 무장대(인민유격대)와 토벌대 양측에 의한 습격과 보복 학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행됩니다.

도두봉 일제 진지동굴 앞에 세워진 안내판
도두봉 일제 진지동굴 앞에 세워진 안내판

Q. 도두봉에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진지동굴도 있다면서요?

A. 네, 그렇습니다. 도두봉에는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군사용 진지동굴이 그것인데요. 제주4·3과 일제강점기를 묶어 이 장소를 통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흥미로운 얘긴데요. 진지동굴이 어떻게 되어 있나요?

A. 도두봉에는 총 4개의 진지동굴이 존재합니다. 입구는 봉우리 동남사면의 하단부와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말기인 태평양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길이가 긴 것은 80m 정도이고 짧은 것은 8m 정도입니다. 디귿 자형 동굴이 3곳이고, 기역 자형 동굴이 1곳입니다. 가장 큰 동굴은 입구가 양쪽으로 2개가 나 있습니다. 현재는 안정상의 이유로 입구를 막아 놓은 상태입니다. 동굴의 간략한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막힌 동굴 입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도두봉에 조성된 산책로를 걷다 보면 쉽게 눈에 띕니다.

Q. 동굴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A. 제주도와 제주역사문화진흥원이 지난 2011년 5월에 펴낸 ‘제주도 일제 군사시설 전수 실태조사’ 보고서라는 자료를 보면 용도를 추정해볼 수 있는데요.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도 북부와 중앙부를 중심으로 주둔했던 일본군 제96사단 예하의 294연대가 이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두봉 바로 옆이 군사비행장이었던 만큼 이곳을 경비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도두봉 중턱 모습.
벚꽃이 만개한 도두봉 중턱 모습.

Q. 지금 도두봉은 어떤 모습인가요?

A. 현재 도두봉은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4·3 당시 일어났던 일을 알 수 있는 유적지 안내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인증샷을 남기는 관광지를 넘어 제주의 역사적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수 있도록 안내판 설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Q. 두 번째로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도두봉 정상에 오르면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인데요? 어딘지 짐작하시겠어요?

도두봉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국제공항 전경
도두봉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국제공항 전경

Q. 혹시 제주국제공항인가요?

A. 네, 그렇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이 처음으로 제주 땅에 발은 내딛는 제주의 관문인 제주공항입니다. 제주공항도 사실 4·3 당시 수차례에 걸쳐 집단학살이 이뤄졌던 학살터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도 전역에서 이뤄진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집단학살도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거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전체적인 피해 규모는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만, 일부 자료에 따라 최소 수백 명이 이곳에서 살해돼 암매장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Q. 제주공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분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 같은데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A. 예. 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건이 알려졌는데요. 우선 1949년 10월 2일, 소위 제2차 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주민 249명이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Q. 군법회의요?

A. 네, 쉽게 말하자면 군사재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군인들이 선고도 내리고 재판을 하는 거죠. 다만 보통의 군사재판이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 당시 재판은 민간인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진행됐습니다. 특히 이 당시 제주에서 벌어진 군법회의는 비정상적인 절차로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엉터리 재판이었습니다. 4·3 당시 학살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 법적 근거도 갖추지 못한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령(우리나라 계엄법이 만들어진 시기는 11월 24일임.)은 말 그대로 군인이 사회 전반을 통제하는 비상상황을 선포한다는 의미합니다. 이 계엄령은 같은 해인 1948년 12월 31일까지 이어지는데요. 이 당시 12월 한 달간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뤄진 군사재판이 제1차 군법회의, 그리고 이듬해인 1949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이뤄진 군사재판을 제2차 군법회의라고 통칭합니다. 1차 군법회의에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871명, 2차 군법회의에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1659명에 달합니다.

Q. 엉터리 재판이라고 하셨는데요. 재판이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말씀이신가요?

A. 네, 그렇습니다. 4·3 당시 이 재판으로 옥고를 치렀던 생존자나 형무소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된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도민들은 군경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구금되었습니다. 구금된 상태에서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고문도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헌법상의 기본권인 변호사의 조력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잡혀 왔는지도 모른 채 형무소로 이송된 후에야 자신의 죄명과 형량을 듣게 됐다고 합니다. 심지어 검찰의 공소장 등 기본적인 재판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시 행해졌던 군사재판이 차마 재판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엉터리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Q.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은 분들이 너무 억울할 텐데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A. 예, 언론에서는 이런 분들은 ‘수형 피해자’라고 지칭하던데요. 이분들이 침묵해야 했던 세월을 깨고 재심 재판을 청구해 속속 무죄를 선고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8년 생존 수형 피해자 18명이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 1월에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을 받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생존 수형 피해자와 행방불명 수형 피해자의 유족이 속속 재심 재판을 청구했습니다. 지난 3월 16일에는 행불 수형 피해자 333명과 생존 수형 피해자 2명이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렇게 판례가 쌓이는 만큼 앞으로 4·3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분들의 한을 푸는 재심 재판 절차가 더욱 수월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Q. 네, 정리해보자면 이런 불법적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도민들 249명이 제주공항에서 집단학살되었다는 거네요?

A. 네, 그렇습니다. 이외에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제주경찰서와 제주항 인근에 있었던 주정공장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도 이곳에서 집단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희생된 주민이 약 500명 정도 가량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Q. 예비검속이라면 육지부의 보도연맹원 사건과 비슷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A. 예, 그렇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적에 부역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을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분류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학살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듯 육지부에서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알려져 있고, 제주에서는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Q. 제주 섬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네요.

A. 네, 그렇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제주는 군대를 양성하는 훈련소의 기능을 했는데요. 그렇지만, 제주도민에게 있어 4·3과 한국전쟁을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Q. 4·3과 한국전쟁이 밀접한 관계다, 무슨 의미이죠?

A. 제주4·3을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사건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 시기까지로 본다면, 도민들은 4·3 속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비검속 당시 희생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4·3 당시 정부에 ‘요시찰 인물’ 등으로 찍힌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두 사건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죠.

Q. 학살터가 제주공항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유해 발굴을 시도해 봤을 법도 한데요.

A. 네,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공항 서북측과 동북측에서 유해발굴을 추진해 총 38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해냈습니다. 유해의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신원 확인이 이뤄져 유족들에게 유해가 돌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130여 구에 불과합니다. 3분의 2 정도의 유해는 여전히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난 2018년에도 제주공항 인근에서 3구의 유해가 발굴되었습니다. 특히 아직도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는 많은 유해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공항 운영 등 현실적인 이유로 발굴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Q. 제주공항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시설물 설치되어 있나요?

A.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상황입니다. 4·3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안내판 등의 시설물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다만,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남북활주로 북측 끝지점에 2007년에 4·3피해자 유해 발굴을 하면서 세웠다는 ‘제주4·3 유해발굴 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갈 수 없는 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안내판의 기능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죠. 제주공항이 제주의 관문이라 불리는데,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제주의 아픈 역사에 대해 더 알고 공감할 수 있는 취지에서 제주공항 한켠에 4·3 당시 국가폭력에 대한 성찰이 담긴 안내판이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Q. 제주공항에 묻혀 있는 유해와 관련한 시가 있다고 하는데요. 소개해 주실까요?

네, 대표적인 4·3 시인인 김수열 선생님의 ‘정뜨르 비행장’이라는 작품입니다. ‘정뜨르 비행장’은 제주공항의 옛 명칭입니다. 첫 연만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정뜨르 비행장 - 김수열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을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그 밑바닥

반백년 전

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번 죽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번 죽고

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숨통 막혀 세번 죽고

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

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

육중한 몸뚱어리로 짓이길 때마다 다시 죽고

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밀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의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 감고 잠든 척하며 창밖을 외면하는 것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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