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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7월 24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은 대정지역에 위치한 4·3유적지인 섯알오름과 백조일손지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여기는 일제 강점기 유적지와 같이 돌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혹시 알뜨르 비행장에 대해서 들어 보셨나요?

알뜨르 비행장 일대.
알뜨르 비행장 일대.

Q. 대정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이용했던 시설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죠?

A. 맞습니다. 대정지역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 학살터는 많은 탐방객이 찾고 있는 곳인데요. 일제 강점기 때 미군이 일본 본토 방어 전략의 일환으로 제주도를 전초기지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군들이 가장 많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알뜨르 비행장과 송악산 진지동굴 등이 일본군의 흔적이 있기도 하고 지상에 돌출된 일제 강점기 시설물이 많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이죠.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비행기 격납고.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비행기 격납고.

Q. 알뜨르 비행장을 가보면 일제 강점기 때 이용되었던 비행기 격납고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잖아요?

A. 그렇습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건설한 알뜨르 비행장의 전투기 격납고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격납고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제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당시 제주도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고난의 흔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Q. 알뜨르 비행장 규모가 상당히 크잖아요. 한반도 중심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 남쪽 끝에 이렇게 큰 규모의 비행장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요?

A.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 전투기 항속거리로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까지 왕복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전투기 연료공급 및 중국 난징을 폭격하기 위한 항공기지로 알뜨르 비행장을 확장해서 운영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비행 훈련용으로 이용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확장해서 현재의 80만 평 규모까지 커졌다고 합니다.

Q. 그렇군요. 혹시 알뜨르 비행장이 제주4·3과도 관련이 있나요?

A. 그렇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4·3유적지인 섯알오름은 알뜨르 비행장 일대에 있는 곳인데요.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탄약고로 이용했던 곳입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이 폭파해 오름의 형태가 무너져 구덩이만 남은 상태입니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된 사람들이 비밀리에 처형된 장소입니다.

Q. 한국전쟁 기간에 예비검속 사건이 발생한 건가요?

A. 그렇습니다. 지난 시간부터 예비검속에 관한 얘기는 종종 했었는데요. 한국전쟁 초기에 북한군과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미리 연행하여 구금하고 비밀리에 학살한 사건을 ‘예비검속 사건’이라고 합니다. 초토화 작전으로 1948년 10월 ~ 1949년 3월 기간에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1949년 3월에 자수를 종용하면서 산에서 피난민들이 대규모로 내려온 이후로 주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대량학살의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죠.

Q. 예비검속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A. 원래 예비검속이라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사용했던 법입니다. 일본에 항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을 미리 잡아들였던 법이 ‘예비검속법’이거든요. 이 법이 불법성이 많아 미군정에서도 폐기했던 법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정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적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구잡이로 사람들은 잡아들이고 학살한 것입니다. 이것이 육지에서는 ‘보도연맹사건’이고 제주에서는 ‘예비검속 사건’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Q. 보도연맹사건이요?

A. 예전에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지도한다’라는 의미로 보도연맹이라고 했는데요.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고 경쟁적으로 가입을 시키면서 좌익활동과는 관계없는 사람들도 많이 가입되었다고 합니다.

Q.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예비검속 해서 학살했단 얘기인가요?

A. 보도연맹에 가입만 하면 과거의 죄를 말끔히 씻어 준다는 얘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가입했다고 해요. 가입 이후에는 정부에 시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각종 홍보에 동원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권 홍보를 위해 앞장세웠던 사람들을 전쟁이 일어나자 이적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비밀리에 잡아들이고 학살을 했던 것입니다. 전국에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숫자가 10만 명이 넘는다고 유족들은 주장합니다.

Q. 그럼 제주에서도 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하나요?

A. 육지에서 발생한 보도연맹사건이 제주에서는 예비검속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순분자를 잡아들이라는 비밀지시를 받은 제주도 각 경찰서는 즉각 요시찰인에 대해 일제히 검거하게 되는데, 주로 4·3과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면서 경찰 개인적 원한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도 많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Q. 제주도 경찰서별로 사람을 잡아들였다고요?

A.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는 4개의 경찰서가 있었어요. 제주경찰서에는 전체 희생자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유족들은 희생자 규모가 1,0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은 제주 바다와 제주공항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집단학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비밀리에 진행해서 구체적인 사건의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서귀포경찰서에서도 서귀, 중문, 남원 지역 주민 150여 명을 구금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학살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DNA 신원조회를 통해 제주공항에서 처형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성산포경찰서는 일전에 말씀드린 문형순서장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예비검속 희생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모슬포경찰서 관내 희생자는 자료가 남아 있어서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Q. 그럼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 건가요?

A. 자료에 따르면,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 대정면·한림면·안덕면 예비검속자 수는 총 344명입니다. 이들 가운데 252명이 군에 송치되어 집단 총살되었는데요. 211위는 유족들이 수습하였고 41위는 행방불명 되어 어디서 사망했는지 알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된 것으로 DNA 조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희생자들은 모슬포경찰서 대정지서 관할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과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7월 16일 1차로 20명이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하고, 한 달 뒤 1950년 8월 20일 (음력 7월 7일)에 191명이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합니다. 나머지 90여 명은 1950년 9월경에 방면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Q. 당시 수감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불법 구금당한 뒤 총살당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A. 그렇습니다. 1950년 음력 7월 7일 (8월 20일) 새벽 2시경에 한림지역 주민이 먼저 총살당합니다. 같은 날 새벽 5시경에는 대정지역 주민이 총살당하게 됩니다. 섯알오름에서 자기 가족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섯알오름으로 시신을 수습하러 간 주민들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Q. 경찰과 군 토벌대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한 건가요?

A. 그렇습니다. 유가족 400~500여 명이 모여들어 시신을 수습하려 하자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공포탄을 쏘며 협박하여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신원 확인도 못 한 채 돌아가야만 했던 겁니다.

학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시신이 한꺼번에 묻혔던 구덩이.
학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시신이 한꺼번에 묻혔던 구덩이.

Q. 그럼 시신들은 계속 수습되지 못한 채 섯알오름에 방치되었던 건가요?

A. 시신은 6년이 지난 후에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학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시신이 한꺼번에 묻히면서 6년이 지난 뒤 찾아간 학살 현장에는 많은 유골들이 뒤엉켜 있어 신원 확인이 쉽지 않았습니다.

Q. 그럼 이미 엉켜있는 유골들을 어떻게 수습했나요? 누구의 시신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요.

A. 섯알오름 탄약고 터는 2개의 구덩이가 있는데요. 한림지역 희생자와 대정지역 희생자가 방치되어 있던 구덩이가 서로 달라서 희생자의 지역 구분은 할 수 있었습니다. 6년이 지나서야 한림리 출신 유족들이 60여 구의 시신을 1차로 수습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정지역 유족들이 학살 현장에서 유해 발굴을 시도했으나 군경의 저지로 실패하게 됩니다. 유족들이 시신 수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유해 발굴이 허용되자 시신이 수장된 물웅덩이에서 양수기로 물을 퍼내 149구의 유해를 발굴했습니다.

Q. 발굴한 유해들은 신원 확인이 되었나요?

A. 발굴한 시신 149구 중 17구는 치아와 옷과 같은 유품으로 신원 확인이 되어 각자 묘지로 옮겨졌으나, 나머지 132구는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 판 위에 머리뼈, 팔뼈, 다리뼈 등을 놓고 적당히 유골을 맞춰 한 구의 시신을 맞췄다고 합니다. 그곳에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유골이 자신의 가족인지는 알 수가 없었죠.

Q. 당시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왜 섯알오름으로 끌려가는지도 몰랐을 평범한 주민들이었잖아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A. 그렇습니다. 당시 희생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예비검속자로 분류돼 구금되어 있다가 트럭에 실려 섯알오름으로 끌려왔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트럭을 타고 끌려가면서 길 위에 가진 고무신, 옷가지를 다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을 상징하는 검정 고무신.
당시 상황을 상징하는 검정 고무신.

Q. 행적을 알리기 위함이었을까요?

A.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겠죠. 가족들은 희생자들이 남긴 흔적들을 따라 땅에 떨어진 옷가지나 고무신을 주우며 섯알오름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Q. 가족들의 고무신이나 옷가지 등을 주우며 섯알오름으로 향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당시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A. 네. 섯알오름 추모비에는 당시 상황을 상징하는 검정 고무신들이 놓여 있습니다. 추모비 뒷면에는 우리 단체 자문위원이신 김경훈 시인님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요. 현장에 가시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섯알 오름길 – 김경훈 시인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젓 담듯 담가져

살아 다시 못 가네

이정표 되어 길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사연(死緣) 전하네

오늘은 칠석날

갈라진 반도 물막은 섬귀퉁이 섯알오름

하늘과 땅, 저승과 이승 다리 놓아

미리내 길 위로 산 자 죽은 자 만나네

녹은 살 식은 피 흩어진 뼈

온전히 새 숨결로 살아 다시 만나네

Q. 당시 트럭에 실려 죽음의 문턱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의 억울한 슬픔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음력 7월 7일 새벽 섯알오름을 걷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고요?

A. 네. 작년 음력 7월 7일, 제주다크투어는 참가자들과 함께 대정지역 사람들이 갇혀 있던 고구마창고에서 그날의 발자취를 따라 섯알오름까지 걸어보았는데요. 죽음을 직감하고 고무신을 내던졌던 그 길에서 참가자들은 신발을 벗어 걸어보기도 하고, 잠시 그 자리에 앉아 희생자들의 기억을 좇아 시와 노래를 함께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올해에도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지고 기회가 된다면 프로그램을 기획해 70여 년 전 칠월칠석날 섯알오름의 이야기를 함께 기억해볼까 합니다.

Q. 정말 뜻깊은 프로그램인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참여해보고 싶네요. 현재 섯알오름에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A. 네. 섯알오름 일대에 추모비 등 여러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예비검속에 대한 진화위의 조사를 거쳐 재판을 통해 배상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의 정비를 통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관제탑 안내판.관제탑에 관한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관제탑 안내판. 관제탑에 관한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Q. 섯알오름 유적지 안내판의 관리상태는 어떠한가요?

A. 유적지 안내판에는 관리 주체 및 연락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유지 관리와 보수를 위해 문제가 있을 때 연락할 수 있도록 이 부분들을 명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섯알오름은 제주를 방문한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찾는 대표적인 다크투어 유적지이니만큼 외국어 안내판을 제대로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내용적인 면에서 인권·평화·젠더 감수성을 고려해 ‘남침전쟁’은 ‘한국전쟁’으로, ‘북괴군’은 ‘인민군’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근처에 안내판이 세워졌는데요. 관제탑이라는 제목 아래 관제탑에 관한 내용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관제탑이라고 하는 건물은 이미 폭파되어 없어졌고, 그 건물은 당시 관제탑이 아닌 급수탑으로 이용됐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증을 거쳐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백조일손지묘 전경.
백조일손지묘 전경.

Q. 두 번째 유적지 ‘백조일손지묘’에는 4·3 당시 어떤 사건이 발생했나요?

A. 아까 1부 섯알오름에서 신원 확인도 하지 못한 채 132구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시신을 거두어 묘지를 매입하여 안장한 곳이 ‘백조일손지묘(지)’입니다.

Q. 무덤 안에 계신 분들은 사실 한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네요?

A. 맞습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백 명의 서로 다른 조상 아래 하나의 자손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묘’라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섯알오름 학살이 일어난 뒤에 6년 넘게 시신 수습을 못 하다가 유족들이 어렵게 힘을 모아서 이 자리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는데요. 그 묘비는 1961년 5·16군사정권에 의해 훼손당합니다.

군사정권 때 훼손되었던 파편들은 모아져 지금의 위령비 옆에 전시되어 있다.
군사정권 때 훼손되었던 파편들은 모아져 지금의 위령비 옆에 전시되어 있다.

Q. 국가폭력을 은폐하기 위해서겠죠?

A. 그렇습니다. 4·19혁명 이후 제주4·3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군사정권에 의해 4·3 진상규명은 탄압을 받게 되죠. 6년 후 후손들이 찾은 것이라곤 유골의 부분 잔해와 유품 몇 가지였습니다. 어렵사리 시신을 수습하고 안장한 뒤 비석을 세웠지만, 군사정권 하의 경찰들에 의해 비석이 파손된 겁니다.

섯알오름 희생자 부분잔해 묻힌 곳.
섯알오름 희생자 부분잔해 묻힌 곳.

Q. 훼손된 묘비는 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A. 당시 파괴된 묘비의 조각들은 유족들이 묘역 울타리 담장 속에 넣거나 각자의 집에서 잘 간직했다가 1999년 6월 다시 꺼냈다고 합니다. 군사정권 때 훼손되었던 파편들은 모아져 지금의 위령비 옆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Q.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비석을 경찰이 와서 부숴버렸을 때 유족들의 심정이 참으로 비통했을 것 같네요.

A. 그렇습니다. 백조일손지묘 앞에는 위령탑이 있습니다. 제주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4·3 위령탑이지요. 대부분의 4·3 위령탑 상단에는 무궁화 또는 태극기가 있는데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4·3희생자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위령탑을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백조일손지묘 안내판.
백조일손지묘 안내판.

Q. 현재 백조일손지묘에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A. 네. 안내판에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안내판을 세운 관리 주체는 표시가 되어 있으나, 안내판 오탈자, 관리 상태 등과 같은 문제점을 제보할 연락처가 없습니다. 또 제주4·3과 한국전쟁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상징성을 가진 다크투어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로 된 안내문이 없어서 외국인이 방문했을 경우 유적지와 관련한 내용을 알기 어렵습니다. 외국어로 된 안내판을 설치할 필요가 있고요.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점자 안내나 음성변환용 코드를 설치해 정보접근성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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