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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5월 8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이수정 홍보기획팀장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지난 시간에 양성주 대표님께서 애월읍 유적지 두 곳을 설명해 드렸었는데요. 오늘은 제가 애월읍에 위치한 유적지 두 곳을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유적지 두 곳은 ‘하귀중학원’과 ‘육시우영’입니다.

육시우영 옛터의 현재 모습.
육시우영 옛터의 현재 모습.

Q. 먼저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먼저 소개해드릴 유적지는 ‘육시우영’입니다. 5월하면 떠오르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5월은 가정의 달이죠.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마음을 전하기 좋은 따뜻한 달입니다. 하지만 4·3 당시 5월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잔인하고도 가슴 아픈 학살이 벌어졌었죠. 특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족 단위의 희생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유적지는 가족 단위의 희생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던 ‘육시우영’에 대해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Q. 육시우영이 마을의 이름인가요?

A. 당시 하가리에는 육시우영이라 불리는 밭이 있었습니다. 이 밭에서 잔인한 학살극이 벌어졌던 건데요. 이를 ‘육시우영 학살사건’이라고 부릅니다.

Q. 하가리라면 알록달록 더럭분교와 아름다운 연꽃마을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이곳 역시도 4·3 당시 잔인한 학살터였군요?

A. 그렇습니다. 하가리는 예전부터 아랫더럭, 알더럭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4·3 당시 하가리는 연화못을 중심으로 가가호호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더럭분교도 1946년 하가국민학교로 출발해 지금에 이른 건데요. 4·3 당시 하가국민학교는 건물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뒤, 1954년 더럭국민학교로 새 출발했다고 합니다.

Q. 당시 하가리에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나요?

A. 초토화작전이 자행되던 당시 1948년 11월 13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당시 외도리에는 9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9연대 군인들이 갑자기 하가리 마을에 들이닥치게 되는데요. 당시 새벽 한 시경에 하가리 마을에 제사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끝낸 후 음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Q. 4·3 당시라면 사람들끼리 모여서 모임을 갖는다거나 잔치를 벌이는 게 조금은 조심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A. 하가리는 일주도로 바로 위쪽에 있어서 4·3 발발 후에도 전혀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별걱정 없이 남의 집 제사 등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데요.

Q. 그런 하가리 마을에 토벌대가 갑자기 들이닥쳤던 건가요?

A. 당시 토벌대가 왜 하가리 마을에 왔는지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요. 여러 설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을 말씀드리면, 토벌대가 산간마을인 원동마을에 무장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하던 중 하가리에 다다랐을 때 마을주민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폭도 모의를 하는 것으로 오해해 학살극을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Q. 4·3 발발 직후에 마을에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토벌대에 굉장히 놀랐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그동안 학살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학살이 벌어질 걸 미리 알았다면 마을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을 겁니다.

Q. 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친 뒤 상황은 어떻게 흘러갔나요?

A. 토벌대는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을 덮치고, 근처 이웃집에도 들이닥쳐 자고 있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는 인근 가옥 10여 채에 불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육시우영’으로 끌고 갔던 겁니다.

Q. 폭도 모의를 했다는 추측 하나로 평범한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고 가옥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조금 힘든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당시 토벌대가 저지른 만행들은 절대 정당화할 수 없고, 학살의 이유 또한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시기를 살펴보면, 육시우영 학살사건이 일어난 날이 1948년 11월 13일이었는데요. 불법 계엄령이 선포되기 4일 전이었고, 초토화작전이 개시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군인들이 임의로 벌인 일이라기보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거죠.

Q. 당시 자고 있던 평범한 마을 주민들까지 끌려 나왔다는 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그게 누구든 육시우영으로 끌고 가 학살을 자행했던 건가요?

A. 그렇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육시우영에 끌려가 25명의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총살당했습니다. 이날 토벌대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꿇어 앉혀놓고 총살 장면을 구경하게 했습니다. 눈앞에서 자신의 부모님, 형제자매가 영문도 모른 채 총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들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토벌대의 잔인함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당시 희생된 분 중에는 만삭의 임산부도 있었다고 합니다.

Q. 당시 토벌대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진 이곳에서 역사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A. 이곳은 현재 개인 소유의 부지입니다. 아쉽게도 당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은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당시 학살이 일어났던 육시우영 인근에는 하가리 마을회관이 있는데요. 4·3 당시의 사연을 담은 안내판을 마을회관에라도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잔혹한 역사를 사실대로 알리고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귀중학원 옛터 현재 모습.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하귀중학원 옛터 현재 모습.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Q. 두 번째로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두 번째 유적지는 ‘하귀중학원’입니다. 전 시간부터 ‘하귀리’하면 항일운동이 왕성했고, 해방 후에도 항일 민족의식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Q. 네. 경찰은 이런 하귀리를 불온시하여 탄압했었다고 말씀해 주셨었죠.

A. 맞습니다. 광복 후 제주는 마을마다 국민학교 설립 운동이 전개되었고, 중등학교 세우기 운동도 같이 추진되었습니다. 교육 열기가 더욱 가속화되었던 건데요. 앞 시간에 제주농업학교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었는데 기억나시죠?

Q. 네. 해방 전후 시기에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고 하셨었죠.

A. 맞습니다. 해방될 때까지도 중등학교로는 제주농업학교와 1년제 서귀실수학교가 고작이었습니다. 제주 읍내에 중등교육 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할 때, 지방에서도 지역 주민들의 손에 의하여 학교가 설립 추진되었는데요. 하귀리에는 ‘하귀중학원’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1945년 10월 설립되게 됩니다.

Q. 해방 이후 제주도의 교육 열기가 뜨거웠군요?

A. 그렇습니다. 『제주교육사』에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중등학교 10개교, 초등학교 44개교가 설립되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저서에도 당시 교육수준을 분석한 자료가 나와 있는데요. 경기도를 제외한 각 도에서 2개 군씩, 그리고 제주도에서 북제주군 1개 군 등 모두 15개 군을 비교한 결과 북제주군의 교육수준이 1위로 나타났습니다. 이 자료만 봐도 제주도의 교육 열기는 어느 곳보다도 뜨거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Q. 항일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해방 후에는 중등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건 하귀리가 당시 진보적인 마을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A. 그렇습니다. 하귀리 주민들은 독립운동가의 마을, 가장 진보적인 마을이라는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귀리는 건준위(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던 곳이었고, 해방 직후에는 환희의 분위기 속에서 축구대회가 유행했었는데 하귀리 청년들은 이에도 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청년들은 마을의 자랑거리였다고 합니다.

당시 하귀중학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하귀리 마을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마을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Q. 4·3 당시 하귀리에 어떤 일이 발생했었던 건가요?

A. 4·3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에 앞서 1930년대 초 마을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1930년대 초에는 지역마다 청년운동으로 야학을 통한 교육계몽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하귀리에도 야학이 설치되었는데요. 신학문에 대한 동경과 애국심을 지닌 학생들이 모여 항일 의식을 키워갔다고 합니다.

하귀리 마을에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1935년 5월 5일 어린이날 항일시위를 벌이다 ‘야학사건’으로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 주모자였던 사람들은 해방 후에 마을을 주도하게 되는데요.

하귀중학원 원장, 하귀중학원 교사, 하귀국교 교장,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산업부장 등이 마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들이었습니다.

Q. 미군정은 이런 하귀리 마을을 주목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미군정은 일찍부터 하귀리를 ‘좌익마을’로 분류해 주목했는데요.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 이전부터 미군정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겁니다.

Q. 1945년 10월 하귀중학원이 설립된 후 미군정과의 마찰은 없었나요?

A. 하귀중학원이 설립된 시기에는 미군정과의 마찰은 없었습니다. 하귀중학원은 11월 18일 미군정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5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본격적으로 중등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학교 설립의 중심적인 인물은 고창옥이라는 사람이었는데요. 고창옥은 해방 전후 마을 구장으로서 애월면 인민위원회의 간부이기도 했습니다.

Q. 그렇다면, 하귀중학원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회주의자로 구성이 되었던 건가요?

A. 그렇습니다. 당시 하귀중학원 원장이었던 고창옥과, 야학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박영순, 강문일 등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귀중학원생들은 자연히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 활동을 하고, 인민위원회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미군정은 이러한 하귀중학원을 낙인찍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Q. 방금 전에 하귀중학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1947년 3·1절 기념식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때부터 본격 대립이 시작되었던 건가요?

A. 그렇습니다. 3·1절 발포사건으로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미군정과 제주도민 간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경찰관의 발포에 3·10 민관 총파업으로 대응했는데요. 당시 하귀중학원도 파업에 동참한 곳 중 한 곳이었습니다. 본격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당시 검거 선풍으로 교단을 잡고 있던 교사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제주 출신 교사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면서 타지역에서 온 교사들이 교단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하귀국민학교 교장 김용관이 검거되고 이북 출신 문창무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하귀국민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Q. 미군정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A. 그렇습니다. 미군정은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앞세워 탄압으로 일관하였는데요. 특히 여론을 주도했던 하귀중학원 교사와 학생들에게 감시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 8월 말경에는 하귀리 미수동을 덮쳐 20여 명을 검거하기도 했습니다. 연행된 자들 가운데는 하귀중학원생, 심지어는 초등학교 어린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무허가 집회에 참석했다는 것과 허가 없이 삐라를 뿌렸다는 것이 이들의 혐의였습니다.

Q. 연이은 검거선풍으로 마을의 청년들은 계속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검거되기 시작하자 하귀리 마을의 청년들은 계속 숨을 곳을 찾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결국 많은 학생들이 산으로 피신하기도 했는데요. 그 바람에 학교에는 학생들이 들쑥날쑥했고, 재정난까지 겹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Q.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학교가 자립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1947년 후반기에 서울에서 ‘조정구’라는 사람이 내려와 하귀중학원을 인수하는데요. 4·3 발발 직전 조정구는 단국중학교로 인가받아 교장이 되었습니다. 단국중학교가 세워지면서 당시 흩어져있던 하귀중학원 학생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미군정의 검거와 탄압으로 학생과 교사들이 검거되고 또 일부 학생들은 산으로 피신하고, 교사들도 제주를 떠나거나 산으로 올라가 버려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4·3 발발 후 10월경에 단국중학교는 폐교되었습니다.

Q. 해방 직후 마을 사람들의 부풀었던 꿈들이 결국 4·3이 발발하면서 깨질 수밖에 없었던 거네요.

A. 그렇습니다. 그간 마을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육지나 일본으로 피신했고, 일부는 산으로 올랐습니다. 단국중학교 학생을 비롯한 많은 청년들이 산으로 올라가 무장대가 되기도 했고, 단국중학교 뿐만 아니라 하귀공립국민학교 교사들 역시 상당수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Q. 그렇군요. 현재 하귀중학원 옛터는 어떻게 보존되고 있나요?

A. 현재 하귀중학원 옛터는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데요. 아쉽게도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Q. 현재 터가 4·3유적지임을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말씀이신 거죠?

A. 그렇습니다. 하귀리는 일제시기 제주에서 조천지역과 더불어 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하고 왕성하게 항일운동이 전개된 마을이었고, 특히 하귀중학원 학생과 교사들은 해방 후 전도적으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주체적인 역할을 했었습니다. 당시 지역의 여론을 주도했던 고창옥 하귀중학원장, 교사 박영순 등 대표적인 인물 등 유적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안내판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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