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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방법원

12월 6일(화) 오전 10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주4·3수형인희생자에 대한 군사재판 직권재심 19차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1948년 내란죄로 기소된 고(故) 김인중님 등 8명과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된 고(故) 이기순님 등 22명, 총 30명에 대해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망 강원철님의 아들 강OO님은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도 12월 16일날 전부 섯알오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5살때 재혼했고, 12살 돼서야 '아 저 아버지가, 의붓아버지가 내 친아버지가 아니구나' 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 내가 아버지를 찾아야되겠구나 싶어서, 1999년도에 아버지가 대전 골령골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 후에는 대전 골령골에 꼭 1년에 한 번씩 참가했지만 아버지 유해는 찾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말을 못하겠습니다만은 이렇게 좋은 결과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망 박한택님의 동생 박OO님은 "제가 59년생이니까 물론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듣고 아버지가 직접 못 가니까 셋째 동생을 보내서 목포로 가서 시신을 인계받고 돌아와보니까 시기가 수상할때라... 작은아버지가 유골함을 어머니에게 드리자마자 그대로 푹 쓰러져서 실신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75년에 돌아가실때까지 멍하니 있을때가 많으셨습니다. 지금 제가 지내오면서 돌이켜보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설움을 많이 안고 사셨구나. 아버지께서는 96년에 어머니께선 75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제가 고등학교다니던 80년대까지만해도 이런얘기 하고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땐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땐 어머니 아버지가 한이 맺혀 살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이런 얘기라고 할 수 있게 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망 현상호님의 조카 현OO님은 "지금 4.3의 피해를 보신분이 저희 아버님이 현장을 모두 목격을 하셨습니다. 아직도 4.3에대한 한이 풀리지 않아서 대화가 중간에 끊기곤 합니다. 저는 6남매중에 장남입니다. 마산형무소로 갔었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은적이 있고, 할머니는 자기 자식이기때문에 글도 모르지만 자그마한 배 타고 마산형무소까지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 할머님이 일흔셋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부끄러움에 말을 못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와라, 저 쪽으로 가면 살려주겠다 하면서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여덞명이 죽었습니다. 아버님이 죽기전에 전부 정리를 해서 손자들에게 넘겨주겠다 라고해서 자서전을 써서 재작년말쯤에 보여주셨습니다. 여동생이 그것을 보고 깜짝놀라서 정리를 조금 해서 해놓게되었습니다. 거긴 농사를 지을수밖에 없는, 사상이고 이념이고 할 것도 없는 철부지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1,2년사이에 한 가정이 파괴되다시피 한 4.3이 참 시리고, 이렇게 얘기하고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다른분들 얘기하는걸 들으니 야트막하지만 그간에 들은 것들을 말씀드리고싶어서 이렇게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라며 말을 마치셨습니다.

망 허경옥님의 아들 허OO님은 "저에게 아버지는 참 술만 드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술만 드시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방황도 했고 가출도 했었습니다. 4·3 피해자 신청을 받았을 때가 돼서야 왜 아버지가 술을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 당신이 당신때문에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의 조카까지 죽을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시 교래리가 저희 본적입니다. 거기서 살던시기에 4.3이 터지면서 총을 앞세운 사람들에게 징역을 살아야한다는 이유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의 조카까지 아버지가 입산자라는 이유로 49년 조천지서 앞에 모이라는 얘기를 듣고 세분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삐라를 받고 49년도에 자수를하셨고, 15년동안 대수형무소에 계시다가 부산형무소로 이감이 되어 수감생활을 하다 나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술을 안먹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술을 안 먹을 수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라는 사연을 전했습니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의심을 배제할 정도여야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그런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라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같은날 오후 2시, 박화춘 할머니에 대한 직권재심이 진행되었습니다. 박화춘 할머니는 1948년 12월 1차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불법적인 재판에서 억울하게 내란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한 4·3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박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70여년간 이 사실을 숨겨왔고, 때문에 4·3 희생자로도 신고되지 않았습니다. 박 할머니의 직권재심은 4·3 희생자 신고없이 진행된 첫 직권재심 사례입니다. 또한 대리인이 아닌 직권재심 대상자 본인이 재판에 출석한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검찰은 최후변론에서 "박화춘 할머니, 잘못한 것 없습니다. 어르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끌려가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가지고 오래오래 사시면 됩니다"라고 할머니를 위로했습니다.

변호인은 "제주4·3특별법에 따르면 피고인은 4·3희생자 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직권재심 대상이 되지 않으나, 희생자로 신고되지 않았음에도 직권재심이 이뤄져 의미가 있습니다. 피고인은 고문에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 것 외에는 죄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70여년간 이를 숨겨왔습니다. 피고인은 이제 나이가 95세입니다. 평생의 한을 품고 살아왔을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요청했습니다.

박화춘 어르신은 제주 사투리로 "어머니네 밭에 숨어서 살다가, 큰아버지 제사가 음력 동짇달인 15일에 제사를 지내러 길에 나왔더니 어떤 사람이 이쪽으로 오면 밥도 주고 한대서 따라서 산에 올라갔습니다. 다음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열지어 서라고 하고, 트럭이 사람들을 싣고서 서귀포 경찰서로 갔습니다. 서귀에서 또 제주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거꾸로 매달아서 자수를 하라고 닦달했습니다. 거짓말로 보리쌀 두 대 내어주었다고 하니 목포로 보내졌습니다. 목포형무소에서 살다가 서울형무소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일 년 살다가 나와서 100살이 되도록 살았습니다. 그동안 아이들 앞에서 창피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암으로 죽고, 작은 아들은 군인을 하며 30~40년 살다가 죽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살아졌습니다" 라고 4·3당시 겪었던 일을 토로했습니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박 어르신에 무죄를 선고하며 "오늘 판결로 옥살이 했던거, 억울했던거 다 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르신의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고 전했습니다.

군사재판 수형인 직권재심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고, 일반재판 수형인에 대해서도 직권재심 대상이 확대하는것이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화춘 할머니처럼 4·3으로 피해를 입었음에도 4·3희생자라고 신고하지 못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이 계십니다. 희생자 미결정 수형인은 2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4·3으로부터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직권재심으로 무죄를 받지 못한 채로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직권재심을 더욱 서둘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희생자 미결정 수형인분들에 대해서도 직권재심이 빠르게 이루어져,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온 70여년의 세월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 품고 살아온 70년... 95세 나이에 '무죄'를 선고받다

[제주 4·3 희생자 재심재판 방청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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