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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내린 어느 주말, 제주다크투어는 와흘리에 다녀왔습니다. 와흘은 선흘 옆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멋드러진 팽나무, 마을의 토지와 마을사람들의 출생·사망 등을 관장하는 마을수호신을 모신 와흘 본향당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네비게이션에 '와흘리 운동장(와흘2길 20)'을 치고 도착하면  4·3 사건희생자위령탑이 보입니다. 4·3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조천읍 와흘리 사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와흘리 4·3 사건희생자위령탑
와흘리 4·3 사건희생자위령탑
와흘리 위령탑 앞 비석
와흘리 위령탑 앞 비석
무자년 4·3 시절 악귀같은 세상 만나
여기 논흘에서 괴뜨르에서 박성내에서
어느 굴렁진 골짜기에서 이름 모를 바닷가에서
무소불위의 총검 아래 쓰러져 가신 영령들이시여.

사랑하는 처가속들에게 가노란 말 못 다 이르고 가신 영혼님네
구름길 바람길에 정처없이 떠도는 영신님네
그간 쌓인 한숨이 바람이 되고, 그간 흘린 눈물이 비가 되었으니
바람 불면 억울한 혼이 오시려나 비가 오면 원통한 혼이 오시려나

통한의 세월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견뎌오다가
오늘날은 육십 년이 지나서야 설운 자손들이 뜻과 힘을 모아
2006년 병술년 섣달 26일날 정성으로 이 빗돌을 세워
억울하고 원통한 4·3 영령들을 삼가 기리나니
영령들이시여 부디 안식하소서
자손들에게 눈물 한숨 거두게 하소서.
- 서기 2006년 12월 26일 와흘리민 일동 건립

기록에 따르면 1948년 11월 11일, 무장대가 조천지서를 습격하고 퇴각하자 토벌대가 이들을 쫓아 와흘리 1구까지 왔다가 마을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급히 '와흘굴' 등지에 숨어서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11월 13일, 진압군이 와흘리2구를 포위했을 때 미처 피하지 못하고 집에 남아있던 노약자들은 희생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잿더미가 된 마을터를 배회하며 일주일 가량 지냈을 때 해변마을로 소개하라는 명령이 전해졌고 주민들이 해변마을로 소개한 지 보름 가량 지났을 때 '자수사건'이 벌어집니다. 무장대와 소통했거나 털끝만큼이라도 가책이 있는 점이 있으면 자수해라, 그러면 살려준다는 말에 약 200여명 가량의 청년들이 자수했고 이 중에는 와흘리 주민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군 주둔지인 함덕국민학교로 찾아간 자수자들은 보름 가량 지난 후에 제주읍내 농업학교로 옮겨졌습니다. 

12월 21일 오후 5시쯤, 토벌대들은 무장대를 토벌하러 간다며 일부를 호명했습니다. 200여명 중 150명이 자원해서 버스에 탔습니다. 토벌하러 가면 자유롭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그랬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박성내에 다다르자 군인들은 10명 단위로 총을 쏴 냇가의 바위에서 떨어뜨렸습니다. 운좋게 총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도 꿈틀거리다 군인에게 발각되었고 군인들은 휘발유를 뿌려 사람들을 태웠습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김태준씨의 증언입니다.

위령탑에서 조금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큰 나무가 보입니다. 그 아래가 와흘굴.
위령탑에서 조금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큰 나무가 보입니다. 그 아래가 와흘굴.

같이 간 선배의 기억을 더듬어 마을 주민들이 숨어있었다는 와흘굴을 찾아봅니다. 아무리 고개를 둘러봐도 찾을 수 없어 한참을 헤메던 중, 마을 삼춘이 지나가십니다.
"삼춘, 이 근처 4·3 때 사람들 숨엉 살던 굴이 어디 이수과?"
"여 앞에 가민 있주게. 저기 저짝에 저 굴 아니."

와흘굴 앞 표지판. 4·3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와흘굴 앞 표지판. 4·3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용암종유석, 용암석순 등 다양한 용암 생성물을 관찰할 수 있는 굴이라고만 적혀있는 와흘굴.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4·3때 사람들을 숨겨주었던 굴입니다. 

당시 박성내에서 희생된 와흘리민 중 확인된 사람은 문명국(40) 백수옥(35) 고창훈(33) 김원근(33) 백태림(33, 이명 백천옥) 김시진(31) 고태순(30) 고공림(29) 백중옥(28) 고윤종(27) 백상옥(26) 김석봉(26) 김기운(25) 김만추(25) 이한봉(25) 김중옥(24) 이성배(24) 이원식(24) 장병호(24) 김영화(22) 김동옥(21) 이성일(21) 임익송(21, 이명 임수송) 김중화(20) 박봉림(20) 양치규(20) 이세봉 (20) 강명식(20) 임경송(19) 임준송(19) 홍영종(19) 문명봉(18) 양치옥(18) 양수봉(20대) 등입니다. 굴 앞에 서서 가만히 이 이름들을 하나 하나 불러봅니다. 

와흘굴 입구. 굴 주변에는 철조망이 있어 들어가볼 수는 없습니다.
와흘굴 입구. 굴 주변에는 철조망이 있어 들어가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곳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4·3 유적지들이 제주 곳곳에는 많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 전해내려오는 곳들도 있지요. 이런 유적지들이 개발의 광풍 속에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4·3 때 희생된 억울한 죽음들을 기억하는 길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주 동쪽에 오신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작은 마을, 와흘에 들러보세요. 못다한 이야기들이, 와흘리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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