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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고로나마 4·3희생자와 유족에게 위로가 되기를


2024년 4월 30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46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사건번호 2023재고합47)이 열렸고, 이미 망인이 된 30명의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들은 제주 전역에 거주하는 농민, 학생, 은행원 등으로 살던 곳이 토벌대 에 연행되어 적법한 절차를 보장받지 못하였으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망 박화민, 망 박화신은 형제로 각 20세, 23세로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48년 가을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타자 산으로 피신했다가 1949년에 자수했으나 이후 가족과 소식이 끊기고 행방불명 되었다. 이 형제의 손자 박00은 법정에서 “내가 이제 50대이고, 자녀가 20대 초반이다. 할아버지 형제가 20대 초반에 농사짓다가 끌려가 희생되었다. 자식들을 보면, 그 나이에 두 분이 끌려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좀 억울하지 않은가. 다시는 국가폭력 행사해서 국민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망 부두천은 4·3 당시 17세로 오현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4월에 토벌대에 연행되어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8월에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총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조카 부00은 “아버지는 5형제였는데, 4·3에 다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출타 중이어서 살아남았다. 내가 그래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평생 가르쳤던 것은 ‘입다물고 살라’였다. 그러나 법은 억울함을 덜어주고, 지워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작은 아버님이 이 법정에서 무죄 판결받아 저승에서나마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똑같은 대한민국 대통령인데, 어느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내리고, 어느 대통령은 죄송하다고 했다. 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하도록 한 것도 대한민국이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지만, 어찌 다하겠는가.”라며 무죄를 선고해달라며 발언을 마쳤다.
이어서 다른 조카 부00은 “작은아버지의 사연 때문에 재판도 없이 할머니는 하도리 공회당에서, 할아버지는 성산포 해변가에서 경찰한테 직접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럴 때다. 나는 그런 상황 때문에 저도 중학교 때까지는 ‘쟤네는 폭도집안’이라고 불리며 기죽고 살았다. 이제 작은아버지는 명예 회복을 하면서 가슴에 품은 아픔을 말할 기회라도 있다. 4·3평화공원에 조부모님의 명패가 있지만, 과연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명패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면서 가족의 아픈 사연을 밝혔다.

망 오한진은 34세에 남원 의귀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토벌대에 연행되어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마포형무소로 보내졌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딸 오00은 “내가 11세였고, 아버지는 30대였다. 어린 자녀들을 지키다 끌려갔다. 이때까지 고생한 생각을 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다 할 수가 없다”라고 말을 아꼈다.

망 부행규는 21세로 결혼 후 북촌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1949년 토벌대에 연행되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행방불명되었다. 이날 재판에는 그의 동생의 아내인 김00이 유족으로 자리를 했다. 그녀는 “남편은 형에 이어서 함덕중학교 앞에서 시어머니를 총살시키는 것을 눈앞에서 봤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밖에 안되었는데, 결혼하니까 매일 어머니 돌아신 것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다고 했다”라며 울먹였다.

망 양용화는 23세로 한림읍 동명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덨다. 그러던 중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선고 받았고,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외조카 강00은 “망인은 나의 외삼춘이다. 우리 삼촌은 4·3사건 당시에 할아버지 제사하고 밤에 오다가 붙잡힌 이후, 자주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조사를 받으로 나갔다가 소식이 끊기는 바람에 50년이 지나서야 희생자 신청을 했다. 얼마나 형을 받은지도 모르고 행방불명으로만 알았다. 50년 동안 가족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 너무 억울하다”라며 사연을 전했다.

망 양일중은 33세로 애월면 어도리에서 농사를 하며 살았다. 이후 1948년 9월 토벌대에 연행되었다가 1949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아들 양00은 “우리 아버지는 4·3 당시에 집에 가만히 있었다. 전날은 밭 갈고 와서 집에 나와 연을 날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마당을 나가보니 경찰관이 와서 연을 날리고 있더라. 이후 경찰이 아버지를 잡아갔다. 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비행장에 끌고가 땅 파서 심는 것이 이게 법인가. 어느 법이 그렇게 하게 되어 있는가”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김성훈 변호인은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 의견을 제시하며 헌법 제12조를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오늘 피고인 모두는 헌법 제정 이후였음에도 이러한 권리를 보장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무죄 선고를 통해 이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길 바란다"라며 변론을 마쳤다.

첫 재심재판에 섰던 방선옥 부장 판사는 30명의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주문하며 다음과 같이 소감을 나겼다. “제주에 온 지 6년째이다,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4·3을 알게 되었다. 제 동생은 함께 와서 4·3에 대한 같이 공부했다. 그런데 내가 재심 사건을 담당하게 될지 몰랐다. 내가 과연 4·3 사건의 유족을 위로할 수 있을까 염려가 있었으나, 오늘 재판을 진행하면서 망인이 된 피고인과 유족에게 무죄 선고만으로 많은 위로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힘든 세월을 살아온 분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감사하다”라며 재판을 마쳤다.

[관련기사] 30명 모두 무죄... 판사 "피고인과 유족에게 위로가 되길"

오마이뉴스, 제주다크투어 작성

[관련기사] 70년 넘는 억울함 하소연, ‘무죄’ 단어로 제주4.3 유족 위로한 법조인들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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