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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월요일,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은 제주4·3평화공원 해설사 여러분들께서 진행하는 가시리와 표선리, 토산리 4·3 유적지 답사에 동행했습니다.

가시리는 4·3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마을 중 하나입니다. 그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가시리에는 현재 '가시마을 4·3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은 가시리 마을의 이야기를 듣고자 오태경 어르신을 뵈러 '가시마을 4·3길 센터'를 찾았습니다.

1931년생, 올해 92세인 오태경 어르신은 가시리에서 태어나 4·3을 겪고 살아난 어르신입니다. 현재는 4·3문화해설사로도 활동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계십니다. 오태경 어르신께서는 이번 답사동안 활동가들과 동행하며 74년 전 겪었던 일들을 눈 앞에 그리듯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주표선 가시마을. 4·3평화재단 제공
가시리는 한라산 남동쪽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입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유채꽃과 벚꽃길로 유명한 가시리는 한라산 남동쪽 해발 90~570m 고도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표선면 전체 면적의 41.4%를 차지할 정도로 큰 마을입니다. 1948년 4·3 당시에는 약 350여 가구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체 마을주민 약 1,600여 명 중 450 명이 4·3 당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는 노형리, 북촌리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입니다.

수용소로 쓰였던 창고 터. 지금은 게이트볼 경기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수용소로 쓰였던 창고 터. 지금은 게이트볼 경기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가장 먼저 향한곳은 토산2리 고구마 절간창고 터였습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공출한 곡식을 보관하고, 절간고구마를 보관하기도 했던 큰 창고였습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게이트볼 경기장이 들어서 있지만, 이곳은 4·3 당시 피난 간 가시리 주민들 중 거처를 잃은 이들을 수용했던 장소였습니다. 이외에도 토산리 주민들이 수용되었습니다.

"군인들이 '너희들 이리 다 나와!'라고 말해 밖으로 나와 보니까, 사람 대여섯을 밭 한가운데 세워놓고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설명하기를, '너희들, 이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거든 박수를 쳐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박수를 쳤다. 사람을 죽이는데 박수를 쳤다."
"지금도 이 터 옆을 지날때는 제대로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지나간다."

정말 잔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중산간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은 커녕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토벌대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버들못을 향하는 답사 일행. 버들못 앞에는 안내판 하나 없습니다.
버들못을 향하는 답사 일행. 버들못 앞에는 안내판 하나 없습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버들못이었습니다. 가시리가 초토화되자 주민들은 살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야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인근 해안마을인 표선리로 피난 간 주민들은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되었습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던 가시리 주민들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이곳 버들못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여기가 표선초등학교에서 거리가 2km정도 되는데, 여기까지 군인들이 늙은 사람들을 등에 총을 대고 이곳까지 와서 들이밀고 76명을 한번에 쏴 죽였다. 나중에 이 밭에 시신들을 흙으로 덮어 두었다가, 1949년 가시리가 복구될 때 가족들이 와서 이장을 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버들못은 현재 개인 사유지인 탓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학살터에서 제법 떨어진 장소에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있어, 오태경 어르신의 안내가 없었다면 학살터가 어디인지 쉽게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4·3 유적지 기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니다.

가시리 주민들이 학살당한 달랭이모루. 안내판만 남아 있고 주변에서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가시리 주민들이 학살당한 달랭이모루. 안내판만 남아 있고 주변에서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흔적만 남아 있는것은 '달랭이모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달랭이모루는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은 1948년 11월 15일, 9연대 군인들에 의해 가시리가 초토화 될 때 냇가에 숨어 있던 일가족 12명이 희생된 장소입니다.

"아들하고 며느리는 멀리 피신하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 살짜리 손녀와 한 살짜리 손자를 데리고 가시천에 숨어있었다. 그런데 군인이 그 위로 지나갈때 아이가 으앙 하고 울었는데, 군인이 바로 수류탄을 넣어버렸다. 네 가족이 그렇게 죽었다. 그 날 서른 명이 죽었다."

달랭이모루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긴 하지만, 이곳을 찾아가는 길 역시 찾기 어렵습니다. 달랭이모루에 도착하더라도 그 때의 흔적은 알아보기 힘들고, 달랭이모루 근처에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제주도에서 만든 가시마을 4·3길에 포함된 유적지이지만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주의 봄은 아름답습니다. 답사를 진행하는 중에도 햇볕이 지상을 내내 따뜻하게 내려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아직도 참혹한 슬픔과 상흔이 묻혀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제주의 현재라면, 참혹함은 제주의 역사입니다. 그 날의 아픔이 세월에 파묻혀 잊혀지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4·3을 기억할 수 있도록 제주다크투어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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