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은 뒤 잦아드는 순간 같았다. 제주 동광리 큰넓궤 안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탁탁 떨어지는 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휴대용 손전등을 모두 끄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며 <애기동백꽃의 노래>가 나오길 기다리던 때였다.
‘아니, 이런 한가로운 생각을 한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 겨울에도 동굴 안이 이렇게 습하고 물방울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이윽고 우리를 안내한 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의 휴대전화에서 <애기동백꽃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산에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 들판에 붉게 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 타다타다 붉은 꽃 되었다더라.”
사실 노래 가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1948년 11월 중순 동광리 주민 120여명이 이곳에 들어와 생활했을 당시의 상황에 자꾸 마음이 갔다. 아이들 칭얼거리는 소리, 어르신들 기침 소리, 날카로운 현무암 바위 위에서 이리 저리 자세를 바꿔 기대며 뒤척이고 끙끙대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끊이지 않았을 테고 당장 오늘 뿐 아니라 앞날을 걱정하는 수근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동굴에서 기거하는 날이 길어지면서 그들이 마주했을 두려움과 고통은 그런 소리들을 때로는 증폭시키고 때로는 지워버렸을 것이다.
해방 후 민초들이 꿈꾸던 세상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한 <제주 4.3 평화기행> 내내 해설을 해주신 김남훈 선생은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말고 최대한 해방 직후 평범한 제주 사람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광복 이후 제주를 포함한 38선 이남 민초들은 과연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었을까? 1946년 7월 미군정 공보부가 서울에서 무작위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나름 ‘객관적’ 판단의 근거가 된다. 10,000장의 설문지를 무작위로 배포하고 8,476명이 응답한 이 설문조사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54%가 중도, 29%가 우익, 17%가 좌익이라 답했고, 선호하는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85%가 대의민주주의, 5%가 계급지배, 4%가 과두제라고 답했다. 일인독재와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도 각각 3%였다. 이것은 비록 서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였지만, 같은 해 4월 서울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실시된 유사한 설문조사에서도 “대체로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다.-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56~61쪽
미군정에서 실시한 위와 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사회학자 전상인은 그리 정교하지 못하고 다소 막연했을 당시 사회주의적 분위기 또는 성향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우선 그렇게 숨막히던 그 때의 정치사회적 갈등 속에서 치러냈던 치열한 삶의 체험은 보통사람들의 사회의식을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또한 상식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특히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다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또한 보다 진지한 자세로 민족이 장래를 걱정했던 것은 거룩한 명분, 지고한 이념, 무서운 권력, 위대한 조직, 그리고 탁월한 리더십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그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았던 바로 그 익명의 대다수 보통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75~76쪽
제주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평화기행에 함께했던 고권일 활동가(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대책위원장)는 제주를 ‘3多’ 이전에 ‘3無’로 설명했다. 도둑, 거지, 대문이 없는 섬. 해방 이후 대부분의 뭍사람들처럼 섬사람들의 소망도 소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애기동백꽃의 노래>의 가사에 나오듯이 “남이나 북이나 동이나 서나, 한 핏줄 한 겨레 싸우지 마라.” 그리고 구걸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
소개령과 학살을 피해 동굴로
‘양민’이라는 일종의 자기검열 또는 미사여구를 끌어댈 것도 없는 이 평범한 사람들은 결국 1947년 3.1절 기념대회 직후 일어난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걷잡을 수 없는 죽음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가게 된다. 1948년 가을부터는 그야말로 처참한 학살이 시작됐다. 이른바 소개령. 제주 토벌 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해안마을로 내려간 사람도 있었지만 산으로 오른 사람도 있었다. 서북청년단이 결합한 토벌대는 5km 밖 중간산 마을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살랐다. 산으로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은 한라산 중턱 여기저기 섬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눈과 비를 피할 수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큰넓궤도 그 동굴 중 하나였고, 지금은 70년의 시간을 넘어 나와 동료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숙였했던 마음도 잠시 안내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처음 동굴에 들어와보는 사람들은 이내 낑낑거리며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 정도인 줄 몰랐다느니, 왜 이 정도라고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 기어가는 요령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이렇게 동굴 한 가운데 들어와서 말로만 알려주고 앞서가면 어떡하느냐 등 불평불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10여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 사람이 납작 엎드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곳을 힘겹게 지났다. 다시 조금씩 고개를 들어 허리를 펴 꼿꼿이 설 수 있는 동굴 안쪽 넓은 곳에 들어와서야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정신을 차렸다. 설명을 듣고 휴대용 손전등을 모두 끄고 그 암흑 속에서 <애기동백꽃의 노래>를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큰넓궤에 머물며 각자 동굴 구석구석을 살피고, 느끼고, 삼삼오오 소감을 나눴다. 몇몇은 박쥐를 보기도 했다.
한번 들어온 다음 나가는 길은 수월할 거라고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동굴 밖으로 기어나와 서로의 옷과 얼굴, 무릎과 팔뚝에 긁힌 자국을 보고 보여주는 것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순간이었다.
40여일을 굴 속에서 지냈던 사람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제주4.3을 처음 알렸던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하이간 굴 속에 있는 사람은 영 행색이 말이 아니라서, 굶언 피골이 상접헌디다가 한겨울에 젖은 미녕옷 한벌로 몸을 가리고 떨고 있는디, 동상 걸려 발구락 모지라진 사람도 더러 있었쥬. 소위 비무장공비란 것이 이 모냥으로 동굴 속에서 비참한 꼴로 발견되니까 냉중엔 상부에서도 생각을 달리 쓰게 되어서.- 현기영, <순이삼촌>71쪽
5월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제주에서 진행된 기행은 기행 자체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도 기행 참가자들을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목요일 밤 난데없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북미회담 취소발표로 활동가 한 명은 금요일 아침 제주행 비행기표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기행을 마친 뒤 몇몇은 뒤풀이 도중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제주4.3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한반도를 둘러싸고 ‘다이나믹’하게 펼쳐지는 이 소식들이 확인해주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미 짐작하고 있듯이 ‘큰넓궤’는 크고 넓은 동굴이란 뜻이다. 제주 방언으로 ‘궤’는 동굴을 뜻한다. 큰넓궤는 그래도 학살에 쫒긴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피란처가 되었지만 오래 계속 있을 곳은 못 되었다. 평화가 없는 한반도를 큰넓궤에 비유할 수 있을까? 제주4.3 70년. 남과 북이 더 이상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각자의 큰넓궤에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날을 막연하지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