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평화기행
제주4·3 70주년을 맞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과거사위원회 회원들이 제주를 찾았습니다. 민변 과거사위원회는 제주4·3 재심 청구 사건부터 시작해 굵직굵직한 과거사 사건들을 주로 도맡아 오셨습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제주 4·3 특별법 개정 운동에도 앞장서주고 계셔요.
민변과 함께 1월 19일과 20일, 1박2일 동안 진행된 평화기행은 4·3평화공원에서 4·3영령들께 참배드리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민변 회원들이 방문한 제주 4·3 평화공원은 4·3 사건 발발 이후 50여 년간 해원되지 못한 4·3 사건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4·3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2008년 3월 28일 조성되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여 4·3 정신과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해 있으며, 약 12만평의 넓이에 위령/추념공간, 역사 재현 공간, 4·3 문화관 등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3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꼭 방문하면 좋을 곳입니다.
유해 없이 이름만이라도 새긴 비석을 놓은 행방불명인 표석. 주변의 조형물들에 새겨진 말들을 따라가며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섬 하나가 몬딱 감옥이었주마씸. 섬 하나가 몬딱(전부) 죽음이었주마씸..." - 시 <섬 하나가> 中
"늙으신 어머님과 처자식의 소식을 듣고 싶사오니 속히 답장하여 주십시오." -형무소에서 온 편지 中
행방불명인 표석에 모셔진 분들은 대부분 육지로 끌려가는 배에 태워져 대전 형무소 등 각지의 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처형되었거나, 제주 인근의 바다에서 수장된 분들이었습니다. 혼돈의 시기에 제대로 된 사법절차 없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것에 대해서 민변 회원들은 많은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제주 4·3 70주년을 맞아서 민변에서는 4·3특별법 개정을 위한 활동을 하고있기도 합니다.
4·3특별법 전면개정안(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은 법률 명칭에 '보상'이라는 단어를 포함시키고,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급 지급 규정을 신설하는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또 희생자와 유족의 의학적·심리적 치유를 위한 제주4·3트라우마 치유센터를 설치·운영하고, 진상보고서에 명시된 1948년 12월, 1949년 7월의 불법 군사재판을 무효화하는 규정도 두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 제주시 을 오영훈 국회의원 대표 발의)
봉안관 안쪽에는 제주국제공항 자리에서의 유해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공간이 있습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제주도에서는 제주공항과 화북동, 태흥리 등 8곳에서 4·3 유해발굴 사업을 4회 추진하여, 유해 400구와 유품 2357점을 발굴한 바 있습니다.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해 놓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7미터 아래에 묻혀계셨다고 합니다. 아직도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아래에는 유해들이 남아 있습니다.
올해 2018년에도 4·3 70주년을 맞이해서 유해발굴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본격적인 발굴은 4월부터 추진되어 올해 말까지 발굴작업이 계속됩니다. 유해발굴 대상은 제주국제공항 1곳(뫼동산 인근, 동서활주로 서단 북쪽, 화물청사 동쪽 구역)과 공항 남쪽 경계 외부 1곳(제주시 도두2동 1102번지 인근), 선흘 1곳(은지난못 인근), 북촌 1곳(북촌리 1240번지 인근), 구억 1곳(구억리 835번지 인근) 등 모두 5곳입니다.
4·3 행방불명인 유해발굴은 문재인 정부 국정 100대 과제에 포함된 사업이기도 합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유해라도 찾고싶은 유가족과 후손들에게 기다리던 소식이 꼭 전해지길 기원해봅니다.
북촌은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 해변마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되었던 곳이었습니다.
1948년 12월 16일 마을을 지키며 토벌대에 협조하던 민보단원 24명이 구좌읍 동복리 지경인 ‘낸시빌레’에서 군인들에게 집단총살 당하였으며,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지자 북촌초등학교 주변 들과 밭에서 북촌 주민 3백여 명이 집단학살 당하는 등 북촌마을은 4·3 최대의 피해마을 중 하나인 곳입니다.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조성되었고,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삼촌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기도 합니다.
'오목하게 쏙 들어가있는 밭'이라는 뜻의 옴팡밭.
4·3 당시 이 일대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밭의 가운데에 있는 작은 봉분도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입니다. 북촌에는 어린 아이들의 무덤인 애기무덤들이 많이 있어서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당시 어른들의 시신은 수습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무덤을 만든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븐숭이 기념관 안에서는 4·3 당시 7살이었던 북촌 노인회장님의 증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4·3으로 인해 동생을 비롯해 가족을 잃은 이야기도 먹먹하고 마음 아팠지만, 마지막 즈음에 하셨던 말씀이 내내 남았습니다.
"저는 4·3에 대해서 신념 보다는 원망이 있었어요.
(예전에는) 이념적으로 생각하면 4·3(항쟁을 주도한) 책임자들이 북촌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 책임자를 가려내고 나머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배상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느냐, 우리 북촌리 역사를 바로 잡아야 된다, 이런 말을 하다보니까 북촌리 전 회장님하고 다툼도 하고 그랬었습니다만은
이제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이 죄가 있는게 아니라 나라가 죄가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든 국가가 책임이지, 그 사람들도 편안한 좋은 쪽으로 세상을 만드려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4·3 당시 증언을 하는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많이 하는 말씀을 노인 회장님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좋은 세상이 와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긴 세월 말 못하고, 추모도 제대로 못하다가 이제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하시는 말씀이 서글프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이 곳 북촌에서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아이고" 곡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이 또 다시 잡혀가고 고초를 당했던 북촌리 '아이고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조천읍 북촌리 '아이고' 사건은
이제 말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좋다고는 하시지만, 아픔이 쉽게 무뎌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마음과 세월을 짐작만 감히 해볼 뿐이었습니다. 기행 참가자들은 노인 회장님과 악수하며,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늦었더라도 좀 더 나은 세상 만들도록 하겠다고,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당부를 드리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