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다크투어 월간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봉개동 4·3길은 4·3 당시 큰 피해가 있었던 마을이며 대외적으로는 대대적으로' 최초의 재건 사업'을 진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동네입니다. 현재는 4·3 평화공원 조성되어 4·3의 역사를 기억하고 추념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지만, 봉개 지역의 4·3 유적지와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제주다크투어에서 봉개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4·3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발굴한 곳을 양성주 대표님에 설명으로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머흘왓동산은 군경 토벌대의 토벌작전으로 움막에 숨어 지내던 주민들 40여 명을 집단 총살 당한 장소이며, 현재 번영로와 번영마트 건너편의 높은 언덕으로 실제 학살장소는 이 주변 밭이었는데 지금은 제주시 농협 봉개지점 봉개동 공영주차장입니다. 일부는 도로 확장으로 도로에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제주4·3연구소 2021.284)
지금은 높은 언덕이었다는 건 번영로를 타고 올라왔을 때 느낌만 고지가 높다 정도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왔다 갔다 하지만 이곳이 유적지인지 모르고 다닙니다. 유적지 안내판이라도 설치되면 지나다니는 누군가가 마음속으로 영령들을 위로하지 않을까 합니다.
초낭가름이라는 동네의 역사는 고씨 4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초낭가름 소남밧 여기는 토벌대에 의해 봉개 섯동네 주민들이 집단 총살 당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특히 도망가지 못한 여자들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소남밧 터는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초낭가름 (참나무가 있는 작은 마을)이란 지명은 버스정류장 명칭으로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봉개교회
역사 문화지에 따르면 봉개리는 함명리 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봉개교회는 4·3 당시 참화를 입고 전소된 후인 1949년에 재건될 당시에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함명교회로 명명되다가 1971년에 봉개교회로 이름을 고쳤다고 합니다.
함명교회에 설치되었던 교회 종이 지금의 봉개 교회로 옮겨져 그때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뭐라도 그때의 기억을 할 수 있게 보여주는 게 필요한 듯합니다.
동보서당은 현 봉개초등학교의 전신이고, 고씨 성을 갖은 여사가 이 부지를 기부하셔서 서당이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인근 마을에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회천, 용강,월평 등지에서도 학생들이 공부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 기행 참가하신 분 중에 고씨 할머니를 아는분이 계셨다.시댁 할아버지 여동생이라고 하시면서 집안 이야기가 나와서 신기해하셨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집안에 가서 잘 조사해서 들려주신다고 했습니다. 동보서당 터에서는 4·3 당시 철도 경찰들이 주둔하여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현 봉개초등학교로 이전해서 잘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봉개초등학교에는 고 씨 할머니에 효열고씨송덕비와 사인강명보처고씨효열지려 총 2기의 비석만 남았습니다. 이렇듯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에 아픈 이야기입니다.
역사문화지에 따르면, 1948년 11월 20일 봉개리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 된 이후 1949년 봄부터 마을 재건이 시작되었고. 봉개리가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섯동네를 에워싸는 거대한 성담을 쌓은 후 이곳에는 봉개리 뿐만 아니라 회천, 용강, 월평, 영평 주민들도 함께 생활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흔적도 찾을 수 없고 버스정류장 명칭이 봉개 남문 정도입니다.
1949년 2월 4일 동부 8리 대토벌을 감행한 2연대의 일부 병력은 봉아름에 성을 쌓고 주둔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축성은 삼양, 화북 등지로 내려간 주민들을 동원해 축성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주둔하는 동안 주민들은 낮과 밤으로 4·3 성의 축성과 보초를 서야 했고 군인들의 식사 준비를 담당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봉개리 재건 당시 난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봉개리 4·3성 안이 아니라 봉아 오름 분화구 안(현 대기고등학교 본관 위치)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견디고 견딘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오늘 같이 참여하신 분들은 일반 참가자로 입도 1년 차 주민 및 제주도에 놀러 오셨다가 참여하신 분, 문화 해설사분들, 제주가치 대표님들, 시 낭송 하신분, 등 여러 분야에서 오셨다.
이렇게 새로 발굴되고 기록된 봉개 유적지를 보면서 이렇게 없어져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었고 어느 곳 하나 안 아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택훈 시인- 곤을동, 김수열 시인 -네살짜리가 뭘 안다고...
시 낭송을 들으면서 마무리했습니다.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 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 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현택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