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하 "진상조사보고서"라 한다)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습니다.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하였고,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과 '전국 형무소 경비를 강화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경·검 및 법원 등은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되었고,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지역은 7월말부터 8월 하순까지 제주도내 4개의 경찰지서(제주읍,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에서 검속된 자들에 대한 총살 집행명령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9월이 되자 제주지역 예비검속 총살 집행은 정지되었고, 남이있던 검속된 자들을 석방하게 됩니다. 그러나 8월 제두도의 유지급 인사들(법원장, 지검장, 제주읍장,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등)들이 연행되는 소위 '유지사건'이 발생하여 제주지격사회는 더욱 공포분위기 였다고 합니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를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그 시작은 일제강점기부터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연합군에 협력하거나 민족주의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선이 가까워지면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기고, 만약 옮길 여유가 없으면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 곧 학살하라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예비검속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즉각 폐지되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 425쪽)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예비검속을 했으나 법적 근거가 없이 이를 시행하려고 했었습니다.
당시 제주도 경찰당국은 비밀리에 검속자에 대한 범죄 경중에 따라 A~D등급으로 구분하여 D가 가장 중요한자, 즉 가장 위험한 자로 순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판단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4·3사건과 관련이 있는 인물 외에도 술자리에서 경찰관과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는 이유로 검속한 사례도 있었고, 부당한 사유로 구속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분류되고 구속된 제주도민들은 제주도 주둔 해병대 계엄사령부에 이관되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인민군이 남하하여 8월 8일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 중에, 부산까지 인민군에 함락될지 모른다는 판단하여 제주도를 최후의 반공기지로 만들기 위해 제주의 검속된 이들의 처리(학살)가 단행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국방부의 지시에 비밀리에 총살명령이 떨어졌으며, 군에 의해 예비검속자의 총살집행이 진행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비밀리에 진행되다보니 아직도 누가 어디서 왜 죽었는지 밝히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일일 기행 첫 방문 유적지는 제주시 용담레포츠공원 한 켠에 있는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입니다. 당시 제주시경찰서는 애월면·조천면·제주읍을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구속한 예비검속 희생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고 있고, 2007년 제주공항 활주로 일부 구역의 유해발굴에서도 관련 희생자가 나오지 않아 더욱 안타까움이 큽니다. 유가족 및 생존자 등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8월 4일 제주경찰서와 주정공장 등에 수감되어 있던 검속자 수백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학살(진상조사위는 '수장'이라고 표현함)을 했습니다. 이후 8월 19일 밤에 제주비행장으로 검속자들을 끌고가 총상시키고 암매장했다고 합니다. 위령비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제주국제공항 활주로가 훤히 보이는 길가로 이동을 했습니다. 활주로 아래에도 분명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유해발굴이 진행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 옆에 있는 양중해님의 노래비가 예비검속 희생자와 그 유족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있습니다. 양중해님도 제주북부예비검속 희생자의 유족이라고 합니다.
떠나가는 자의 소원
현곡 양중해
1950년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그 날 밤
우리들은 한도 많은 이 길을
서로 얼싸 안고 떠나갔노라.
이승 사는 동안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무덤 하나 남겨두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떠났노라.
우리들이 말 못한 말들이사
살아 있는 그대들인들 어찌 모르랴
그대들의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가
아들 손자들에게도 전하여 다오.
아름다운 우리 고장 제주도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는
진실로 평화로운 섬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손을 잡고 굳게 약속하여 다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제주경찰청에 있는 '문형순 서장 흉상' 입니다. 문형순 경찰서장은 4·3 당시‘ 의로운 사람’ 중의 한 명으로 2018년 올해 경찰영웅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성산포 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한국전쟁 직후 군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제주·서귀포·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는 대다수 예비검속자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성산포 경찰서 관할지역에서는 단 6명의 희생으로 그쳤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경찰계에 투신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모슬포경찰서 서장 대리로 있을 때, 자수한 입산자들을 풀어주는 등의 선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안도 태생에 남겨진 자손도 없어 잊혀질 수 있었으나 제주경찰의 지원과 시민들의 관심으로 그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지역의 예비검속 희생자들과 관련한 유적지로 향했습니다. 우선 한림읍에 위치한 '만벵듸 공동장지'를 방문했습니다. 1950년 한림항 어업창고에 수감되었다가 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집단학살 된 민간인들을 6년 후 매장한 묘지입니다. 만벵듸 공동장지의 희생자는 당시 한림 및 무릉 지서에 검속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학살된 후 유족들은 시신이나로 찾고자 했으나 당시 군부는 시신을 찾아가려는 사람도 즉시 사살하겠다고 하여 찾지 못하였습니다. 6년이 흘러 유족들은 사전에 논의하여 새벽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당시 총 62위의 시산을 찾아 일부는 신원이 확인되어 유족이 모시고 남은 유해 46위를 이곳 만벵듸 공동장지에 모시고 매년 음력 7월 7일에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방문지는 대정읍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 입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큰 규모의 무기고가 있었는데, 해방 후 미군정에 이해 폭파되어 큰 구덩이 2개를 남긴 채 무너졌다고 합니다. 예비검속으로 한림항 어업창고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60여 명이 1950년 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 총살되었고, 새벽 5시에 모슬포 고구마절간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130여 명이 총살되었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만난 희생자 유족 양신하님의 말에 따르면, 당시 검속자들은 수감되어 있던 곳이 비좁아 더 넓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얘기에 가지고 있던 옷가지와 이불 등을 모두 가지고 트럭에 답승하여 섯알오름에 왔다고 합니다. 아마 중간에 총살 당할 위기를 직감하고 신고 있던 고무신을 차 밖으로 떨어트려 본인들의 위치를 알리려 했다고 합니다. 이 슬픈 이야기를 들은 이름 모를 예술가가 현재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위령비 아래 고무신을 전시해 놨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에 가면 오른쪽 웅덩이가 한림항 어업창고에서 수감되었던 검속 희생자의 학살터이고, 왼쪽 웅덩이가 모슬포 고구마절간에 수감되었던 희생자의 학살터입니다. 이곳 희생자의 유족 중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후 그들은 배상비를 모아 각 지역 공동묘역도 마련하고 위령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섯알오름 근처에는 '백조일손지지'가 있습니다. 바로 모슬포 고구마 절간에 수감되었다가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132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6년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유해의 신원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유족들은 논의한 끝에, 백명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1명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정했다고 합니다. 이곳에 가지서 훼손된 비석을 전시해 놨습니다. 1956년 시신을 수습한 유족들이 합동 묘역을 만들고 그것에 세워졌던 묘비였는데, 5·16 군사정변 이후, 이를 탄압하여 훼손되었던 것을 유족들이 잘 숨겨 보관하였다가 다시 묘역을 정비할 수 있을 때 이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제주4·3, 그리고 반공의 어두운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예비검속 관련 유적지는 '삼면원혼제단' 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무고하게 검거 돼 행방불명된 서귀면 14명, 중문면 45명, 남원면 22명 등 3개 면의 81명 희생자의 넋을기리는 추모공간입니다. 당시 예비검속자들은 7월 29일 (음력 6월 15일) 새벽 군 트럭에 실려 나간 뒤 행방불명됐습니다. 매일 예비검속자를 찾아왔던 가족들은 어느 날 검속자들이 사라져 수소문하니, 정방폭포 근처에서 학살당했거나 바다에 끌려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방으로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중 10명은 2007~2008년 옛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123구의 유해 가운데서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이 위령제단은 2002년 서귀포시 하원동에 건립 돼 해마다 음력 6월 15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주 예비검속은 이 외에도 '유지사건' 까지 이어집니다. 당시 제주의 유지급 인사 16인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는 혐의로 1950년 8월 초에 제주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피의자 장용문이 8월 14일 고문치사하여 사태는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이에 당시 김충희 제주도지사 등이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청을 정부에 했고, 확인한 결과 당시 신인철 대위가 최남식 예비검속자로부터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꾸며 사건을 조작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후 연행된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제주 사회는 극도로 위축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은 전국에서 진행 중입니다. 대전 골령골의 유해발굴은 올해까지 진행되고 발굴장소에는 평화공원이 설립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더디지만 꾸준히, 앞으로도 국가공권력에 의한 학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이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