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25일 제주4‧3 70주년 평화기행에 참가한 평화교육연구회 신혜영(나산초등학교 교사) 님이 기행후기를 기고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말러에서 보드게임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기억, 추모, 변화
추운 겨울 인고의 시간 속에서도 기다림으로 붉은 사랑의 꽃을 피우는 동백! 늦가을의 쌀쌀함과 함께 우수가 짙어지던 11월 24일~25일, 제주의 땅 곳곳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색색의 동백이 하나둘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주4‧3 70주년을 기념하며 교사, 학예사, 출판사 관계자로 이루어진 ‘평화교육연구회’의 일원으로 다시 찾은 이번 여정은, 제주시민의 아픔을 기억하고 함께 하고자 제주다크투어가 이끄는 길을 따라 걸으며 평화와 인권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공항 문을 나서며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와의 짧은 조우는 여느 때의 돌하르방과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을 넘어 평화와 역사의 기운을 도전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평화의 바람을 타고 처음 들른 곳은 ‘4‧3평화공원’이었다.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4‧3평화공원은 4‧3 사건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공원 안에는 제주 4‧3의 역사를 담은 그릇 모양이 인상적이었던 평화기념관을 중심으로 위령제단, 위령탑, 봉안관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제주 태생의 최상돈 선생님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자세하고 실감나는 설명과 함께, 4‧3의 역사를 발단에서부터 결말, 현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찬찬히 보고 듣고, 충분히 감동하기”에 초점을 두고,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기보다는 전시물 곳곳에 숨겨진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 주력하였다. 특히,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런 글씨 없이 드러 누워있는 기둥 모양의 백비는 마치 4‧3의 진실이 송두리째 새하얗게 덮어버려진 것 같아, 진실을 밖으로 알리지 못하고 아파한 사람들의 감정에 이입되어 가슴 먹먹함과 동시에 분노감을 느꼈다.
다랑쉬 동굴 재현 공간의 실제감은 그 날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했는데, 이리는 총부리, 저리는 막다른 벽, 죽음의 두려움이 몰려와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운은 뒤이어 찾은 선흘 곶자왈의 도틀굴에서 극대화되었는데, 어른의 몸을 한껏 움츠렸을 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땅굴에서 어린 것들의 생존을 걱정하며 경비하던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을 떠올리니, 최상돈 선생의 ‘애기동백꽃의 노래’와 동요 ‘고향땅’의 구슬픈 선율과 함께 곶자왈 곳곳에 깃든 처연한 기운이 모두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아 온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이튿날 답사는 처음보다는 한결 무뎌진 기분으로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곶자왈 작은 학교’ 초등학생 친구들의 왁자지껄함이 발걸음에 경쾌함을 더해주었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수줍게 맞춰가던 오카리나 화음이 제주도의 아픔을 담은 진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일정은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섯알오름까지로 꾸려졌다.
4‧3의 상처를 평생 온몸에 간직하고 살다간 무명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한 여성의 한평생의 한(恨)을 개인의 숙명으로 치부하고 은폐할 수 있을까, 잘못된 사회로부터 받은 개개인의 상처는 과연 누가, 어떻게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제주 사람들 저마다의 사연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동알오름 일제군사유적들의 비극은 가까운 산방산의 신비한 광경에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비탈길 곳곳에 남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보고, 답사팀 모두가 슬픈 마음을 따뜻한 한마디로 서로 어루만지며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평화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모인 우리들의 ‘연대’가 깊어지고 넓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제주4‧3 또한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서로 돕고 힘을 합친다면 조금은 더 수월하게 과거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제주4‧3 70주년에 이른 지금이야말로, 제주를 넘어 한반도 전역에 평화를 위한 모두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지난 5월 19일, 용인 포은아트홀에서 도립제주교향악단의 말러 교향곡 5번 공연을 관람했었다. 검정색 옷을 입은 연주자들의 왼쪽 가슴에 붙은 빨강 동백의 코사지가 의도된 복선이었을까,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된 연주였지만 마지막 악장에서 환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러의 말처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제주 4‧3의 진실도 대한민국의 역사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도립제주교향악단은 말러의 음악과 함께 추모 공연을 이어가고, 제주다크투어팀은 또 다른 이들에게 제주의 숨은 진실 찾기 여정을 인도하고, 교사인 나는 ‘4‧3 보드게임 꽃을 피워라’ 교육 활동을 통해 ‘그 날’의 진상을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고, 모진 추위를 뚫고 결국 동백은 꽃을 피운다고, 제주 4.3의 아픔 또한 모두의 작은 노력으로 아름답게 승화되어 세상에 또 하나의 잔잔한 감동을 선물하길 기대해 본다.
4‧3 기행을 마친 평화교육연구회 회원 분들이 여비를 아껴서, 강정마을에 후원하고 싶다고 소정의 후원금을 전달해주셨습니다. 제주해군기지 반대활동을 이어가고있는 강정마을은 4‧3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곳들 중 하나입니다. 전해주신 후원금으로 아래 강정평화상단 귤을 주문해서 기찻길옆작은학교 등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따뜻한 마음에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