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영화 ‘지슬’을 보며 제주 4·3 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이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콩닥거렸던 것과 한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자막이 없이는 제주 방언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았었는데, 난민 단체에서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4·3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사실 4·3을 ‘지슬’로 배운 나는 4·3은 아무 것도 모르는 제주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안타깝고 슬픈 사건이라는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행의 해설을 맡은 제주다크투어의 백가윤 공동대표는 내 생각을 아는 것 마냥 ‘4·3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희생당한 사건이 아니다’라며 4·3 평화기념관에서의 해설을 시작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과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일어난 3.10 총파업,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붉은 섬’으로 규정을 당한 후 무자비한 탄압이 일어나고 시민들이 고문치사를 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이에 대항하고자 발생한 4·3 무장봉기와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효화된 선거구를 만들어낸 5.10 선거 보이콧에 이르기까지 제주 사람들의 항거의 배경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누적된 수탈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시대가 너무나도 엄혹했다.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시작한 미국과 이를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제주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을 하기 시작하는데, 1948년 10월 선포된 포고령과 11월 선포된 계엄령으로 인해 해변에서 5km 바깥 구역, 중간산 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폭도로 규정을 당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를 당하기 시작한다.
이 ‘초토화’시기에 마을 사람들을 숨겨주었던 선흘 동백동산의 도틀굴, 하루아침에 300여명의 주민이 집단 학살을 당했던 바닷가 북촌 마을, 주민들이 모두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어 마을 자체가 사라져버린 빼앗긴 마을 무등이왓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였는데, 위령비와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렇게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 사람들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목하에 또다시 희생을 당하게 된다. 15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던 섯알오름 자락의 학살터에서는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것마저도 금지를 당하다가 6년이 지난 후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체가 썩고 유골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고, 후손들은 132구의 유골을 한 곳에 이장하며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묘지를 백조일손지묘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사실 기행 내내 들은 말이 안되는 것 같은 탄압의 이야기들이 나를 포함한 난민단체의 활동가들에게는 낯설지가 않았을 것이다. 3.1 절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3.10 총파업에 참여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빨갱이’가 되어 경찰에 끌려가고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집트의 군부정권 퇴진을 외치며 시위에 참석했다가 아버지, 형, 남동생이 모두 경찰에 끌려가고 본인까지 ‘테러리스트’라는 명목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6개국을 떠돌다가 한국에 오게된 난민 O가 생각났다.
북촌 주민들이 집단 학살 당한 지 5년이 지난 후, 주민들이 육지에 나가 객사한 마을 청년들의 상여를 메고 북촌국민학교 교정을 지나가다 그 곳에서 학살당한 가족과 이웃들을 생각하고 “아이고 아이고”하며 울었다가 “빨갱이가 죽었는데 울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사람들을 조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에티오피아에서 오로모족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다가 “불순분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서 고초를 치렀다는 난민 E가 생각이 났다.
7년 7개월, 그리고 그 이후로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제주 사람들을 괴롭혔던 4·3의 광풍과 같은 국가폭력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박해를 피해 한국을 찾은 사람들을 한국 정부는 난민으로 보호하겠다고 약속을 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난민 O가 단순 시위 참가자이며 정부에서 주목을 받지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난민으로 보호하기를 거부하였고, 난민 E의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다며 한국에 입국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 되어버린 난민들의 목소리에 한국 정부는 귀를 닫고 보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백조일손지묘 위령비 옆에 있던 낯선 돌무더기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정권은 진상조사를 요구하던 백조일손지묘의 유족들을 연행하고, 비석을 깨부수기까지 했었으나, 유족들은 이 때 파괴된 묘비의 조각들을 각자의 집에서 잘 간직했다가 좋은 세상이 온 후 다시 꺼내 모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을 찾은 난민들이 ‘좋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마음껏할 수 있는 때가 올 때까지, 이들의 삶이 한국에서 안전하게 간직될 수 있도록 이들의 권리를 열심으로 옹호하는 것은 우리가 4·3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