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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찾은 전국인권활동가대회 참가자들
제주를 찾은 전국인권활동가대회 참가자들

2월의 마지막 날 비는 내리고 바람은 거셌다. 김포에서 탄 저가항공사의 비행기는 요동을 쳤다. 좌우, 위아래 동시에 급강하와 급상승의 반복, 비행기가 깨질 것만 같았다. 창밖으로 급하게 흐르는 구름 아래 제주공항이 보였다. 하지만 착륙은 못하고 뱅뱅 돌기만 하더니 김포로 회항한다고 했다. 김포로 도착하는가 싶더니 다시 청주공항으로 기수를 돌렸다. 5시간 반 동안 비행기에 갇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도착한 제주도. 전국인권활동가대회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다음날인 3월 1일 4·3기행의 코스를 다녀오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컸다.

첫 번째 코스는 동광리 큰넓궤였다. 이전에 두 번이나 가려다가 실패했던 곳이다. 어디 마을의 어귀에서 목장을 지나서 근처를 빙빙 돌다가 결국은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곳인데, 어라 이번에는 큰 길에 안내판이 떡 붙어 있었고, 돌길을 걸어서 10여 분 올라가니 길 바로 옆에 큰넓궤의 입구가 있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비바람과 안개 탓이었을까?

헬멧을 쓰고 큰넓궤 속으로
헬멧을 쓰고 큰넓궤 속으로

사각의 철제 파이프로 입구는 막혔지만, 그곳으로 가뿐히 몸을 밀어 넣었다. 동굴로 몸을 밀어 넣자마자 훅 얼굴에 끼쳐오는 습기, 그보다도 먼저 이곳이 동굴임을 알게 하는 어둠이 있었다. 랜턴 불빛이 없다면 발부리 아래도 볼 수 없는 칠흑의 어둠, 그리고 만약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면 머리는 현무암 천장에 수시로 부딪혀 상처투성이였을 것이다. 입구에서 바로 철제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굴이 넓어졌다. 뾰족한 돌기들이 천장에 물기를 머금고 매달려 있는 중에 박쥐 한 마리가 미동도 않고 동면 중이다. 사람들이 스마트폰 램프를 켜고 사진을 찍어대고 전혀 느낌이 없다. 깊은 잠이다.

동굴의 짙은 어둠 속에서

큰넓궤 속 깨진 사기그릇의 파편
큰넓궤 속 깨진 사기그릇의 파편

굴의 가장자리에는 깨어진 항아리며, 사기그릇들의 파편들이 널려져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물들이다. 그런데 7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깨끗해서 과연 7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이 쓰던 그릇들일까 의심이 든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천장은 사람이 앉아있지도 못할 만큼 낮아지고 폭도 급격하게 좁아 들었다. 그곳 동굴의 양 옆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영화 <지슬>이 생각났다. 동굴 밖은 토벌대가 장악한 곳, 동굴 밖으로 한 걸음 나가기도 두려운 지경에서 120명의 주민들은 두 달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이 어둠 속에서 말이다. 앞 동굴을 지나 뒤 굴까지 가는 통로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한 돌들이 좁은 통로였고, 고개를 좀만 들어도 동굴 천장에 부딪혔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수십 미터를 기어나가니 다시 천장이 높아지고, 너른 장소가 나왔다. 동굴의 길이가 180미터라고 했는데 이곳이 마지막 지점이다.

큰넓궤 안을 들어가 보았다
큰넓궤 안을 들어가 보았다

안내하는 이성권 씨가 모두 불을 꺼보자고 했다. 하나 둘, 순간 불빛이 사라지고 눈 뜨고도 옆 사람이 보이지 않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어둠에 갇혀 버렸다. 젊을 때 첫 감옥 시절, 영등포교도소의 먹방이 그랬다. 동굴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아니 언제 토벌대에 발각되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공포를 안고 그들은 하루하루 연명했을 것이다. 영화 <지슬>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들을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곳에 살던 120여 명의 주민들은 굴이 발각되자 이곳에서 탈출했다. 임신한 임산부는 이 굴을 빠져 나가지 못했다고 하니 아마도 배 속의 아이와 이 굴 안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굴을 나갔던 이들의 목숨도 길지 못했다. 일부는 토벌대에 체포되어 정방폭포에서 학살당했고, 그들의 시신은 찾을 수도 없어서 헛묘를 만들었다고 했다. 거기서 체포되지 못한 이들은 한라산을 오르다 모두 죽었다고 한다.

동굴을 나오니 밖은 여전히 세찬 바람이다. 제주 4·3평화공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바람이 몹시도 세찼다. 전시관을 다 돌고 나오는 마지막 코스가 다랑쉬 동굴이었다. 발견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했다고 했는데, 동굴 안의 유골들이 여기저기 나란히 있는 그중에 눈에 들어온 건 그들이 남긴 유물들이었다, 깨진 솥단지, 사발들, 그리고 숟가락… 제주 4·3에 제대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현기영 선생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장편소설이었다. 거기 무장대 대장이었던 이덕구의 시신 윗도리 주머니에 꽂혔던 숟가락 하나, 세상에 먹고사는 일만큼 절박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덕구 산장을 돌아보았을 때도 그랬다. 무장대들도 별 수 없이 산 속에 숨어 살면서도 무언가를 먹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이덕구 산장의 깨져서 널려 있는 그릇들이 눈에 남았다. 이 큰넓궤에서도 그 짙은 어둠 속에서 감자며 고구마 등으로 겨우겨우 먹으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살았을 사람들을 흔적을 본다.

송악산을 지나며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송악산 진지동굴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송악산 진지동굴

제주 곳곳은 학살현장이다. 지금은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지만, 제주 4·3 학살지도를 보면 어느 한 마을이라도 학살이 없던 곳이 없을 지경이다. 국민 관광지로 이름난 송악산도 일대도 그렇다. 송악산을 가게 되면 제주도가 왜 비극의 땅인지를 알게 된다.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이 한반도를 놓고 대립하게 되고 제주도는 남방세력이 북방세력의 힘을 저지하는 최종적인 군사적 전략지로 꼽혀 왔다. 지정학적으로 힘이 충돌하는 지점인 만큼 역사적으로 불행을 겪어왔지 않았을까.

일제는 세계 제2차대전의 최후 결전지로 제주를 택하고 여기에 7만의 군부대를 주둔시키고, 제주도민을 동원해 제주도 전역을 군새 요새로 바꾸어 놓는다. 그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송악산이다. 마라도 행 여객선을 타는 곳 옆의 절벽 밑에는 동굴 진지가 있다. 그 동굴들이 무너져 내려서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만 긴 것도 있고, 짧은 곳도 있다. 거기에 전투정을 정박했다가 미 함정을 공격하려고 했다고 한다. 알뜨르 비행장으로 넘어가는 길 셋알오름에는 대공포 진지도 있다.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대공포 진지였다. 알뜨르 비행장에는 소형 전투기 격납고가 19개가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여기서 경비행기를 타고 활주로를 달려 나가 이륙해서는 미 함정을 향해 자살 공격을 감행했을까? 풀밭 속에서 어렴풋이 남아 있는 활주로의 흔적마저 볼 수 있었다.

송악산 앞에 선 인권활동가들
송악산 앞에 선 인권활동가들

알뜨르 비행장에서 바다로 향해 걷다가 오른편에 섯알오름이 있다. 그곳에서는 제주의 2차 학살에 해당하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던 곳이다. 1950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전국에서 예비검속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모슬포 경찰서에 검속되었던 이들은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당했는데 새벽 트럭을 타고 이곳으로 오던 이들은 길에 고무신이나 옷 등을 차 밖으로 던져서 자신들이 끌려가는 곳을 알렸다고 한다. 일제가 탄약창고로 썼던 곳이고, 나중에 미군이 점령한 뒤에는 일제의 무기들을 폭파시켰던 곳이라 마침 웅덩이가 깊이 패어 있었고, 그곳에 학살당한 이들의 시신을 던져 버렸다. 유족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유골들을 수습할 수 있었고, 1차로 수습된 유골은 만벵디 묘역으로, 2차로 수습된 이들의 유골은 백조일손지지로 모셨다. 유골이 뒤엉켜 누구의 유골인지도 모르는 터라 배 조상의 한 손이라는 의미로 무덤을 만들었다니… 같은 날 제사를 올리는 집들이 제주 마을마다 있는 것은 같은 날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비극이 땅 제주는 그날의 참상을 말도 못하고 깊은 원한을 안고 지내왔다. 이제는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기억되어야 한다.

섯알오름 학살터
섯알오름 학살터

월령리에서 무명천 할머니 삶 터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분이다. 이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건 1999년이다. 그때 김동만 감독이 다큐로 소개했다. 제4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다큐를 통해서 무명천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1949년 1월 토벌대의 총에 맞아 턱이 날아갔고, 그로부터 55년을 턱에 무명천을 대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제주 4·3의 고통을 한 평생 온 몸으로 증언하며 살았던 이다.

한림읍 월령리의 시원한 해안이 바로 집 앞이고, 할머니가 평생 일했던 손바닥 선인장 밭(월령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선인장이 자생하는 곳)이 지척이다. 제주 시민단체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집을 매입했고, 관리하고 있다. 겨우 7평의 두 칸짜리 집인데 안쪽은 방이고, 바깥쪽은 부엌 겸 거실이다. 이곳에서 90세의 나이로 200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방에는 평생 턱을 감쌌던 무명천이 유리함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벽에 붙은 사진들, 젊을 때는 온전하게 턱을 가졌던 여성이었는데 4.3의 비극 이후 그는 무명천을 덧대고 살면서 물 한 모금 먹는 모습조차 남에게 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 원망스러운 삶을 인내했던 세월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허영선 시인이 시로 보여주는 그 원한 맺힌 세월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명천 할머니 삶터를 돌아보는 인권활동가들
무명천 할머니 삶터를 돌아보는 인권활동가들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그녀 몸의 소리를 (후략)
- 허영선, 「무명천 할머니 - 월령리 진아영」

할머니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그의 삶은 제주도민의 삶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작고 볼품없는 할머니의 삶터를 찾아가는 것이리라.

다시는 4·3을 묻히게 말자

동굴에서 죽고, 옴팡밭에서 죽고, 절벽에서 죽고, 골짜기에서 죽고, 오름에서 죽고, 바다에 수장되어 죽고, 형무소에서 죽고, 시신조차 찾을 길 없는 헛묘의 주인공들은 기억되어야 한다. 그 비극의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비극의 역사일수록 선명하게 기억되게 할 때 다시는 그런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독일인들이 베를린의 한 복판에 자신들이 저지른 유태인 학살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외면하지 말자. 바로 제주의 4·3 학살터,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존중과 평화의 소중함이 싹트고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제주 4·3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때는 언제인가.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제주를 찾은 인권활동가들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제주를 찾은 인권활동가들

*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평화기행 사업의 하나로 지난 2월 28일~3월 2일,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이 제주를 방문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 4·3 역사의 현장을 돌아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님께서 기행 후기를 기고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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