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의 마을 성산. 성산일출봉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방문한다고 할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성산의 아름다운 풍경 뒤에 어떤 비극이 감추어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난 달 18일, 제주다크투어에서는 <일출의 마을 성산, 걸어서 만나는 4·3역사>라는 주제로 월간기행을 진행했습니다. 이날 월간 일일기행은 '터진목'에 위치한 제주4·3 성산읍 희생자 추모공원을 시작으로 길을 따라 걸으며 일제강점기 진지동굴, 서북청년단 특별중대 옛터, 성산지서 옛터, 우뭇개동산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성산리는 제주도 동쪽 끝에 튀어나온 섬 아닌 섬입니다. 지금은 해안도로 등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산은 물이 차고 빠짐에 따라 길이 열리고 닫혔습니다. '터진 길목'이라는 뜻의 '터진목'이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붙은 것입니다. 고립되기 쉬운 지형적 특성 탓에 4·3 발발 초기 성산지서 습격을 제외하면 무장대부터의 공격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산국민학교에 주둔해 있던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 주민들에게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성산면과 구좌면 등을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잡아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곳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매일같이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는 비명소리와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합니다.
월간 일일기행의 첫 일정은 터진목에 위치한 제주4·3 성산읍 희생자 추모공원이었습니다.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에 의해 212명이 희생된 터진목 인근에는 현재 성산읍 4·3희생자 유족회가 세운 제주4·3 성산읍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위령비에는 추모글과 함께 성산면과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 붙잡혀 희생 4·3희생자 467위의 이름이 마을별로 세워져 있습니다. 위령비 앞에 고개숙여 묵념하며 4·3 영령들이 안식에 들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다른 위령비에 새겨진 강중훈 시인의 <섬의 우수>를 직접 낭독하며 파도에 쓸려나간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보기도 하였습니다.
해안길을 따라 걸으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아름다운 성산일출봉, 그 해안가에는 일제강점기의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일제의 마지막 결사항전, '결호작전'을 위해 만들어진 진지동굴이 그것입니다. 해안가를 따라 동굴이 여럿 형성되어 있는데, 그중 일자형 동굴진지는 일본군의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한 유인 어뢰를 보관하기 위한 격납고였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의 주둔지였던 성산국민학교 옛 터였습니다. 당시 성산국민학교에는 100여 명 정도의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약 3개월 정도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산국민학교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은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던 감자창고를 이용했습니다. 당시 서북청년단이 주둔했던 곳과 남아있는 건물의 장소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주민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감자창고는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건물은 뼈대만 남은 채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주둔지 옛터 앞에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표현한 시를 읽어보며, 주민들이 서북청년단 때문에 느꼈을 공포와 고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성산지서 옛터였습니다. 성산지서는 제주4·3이 발발한 1948년 4월 3일 인민유격대의 습격을 받은 12개 지서 중 하나입니다. 4·3이 발발하기 전인 2월경에는 이 지역에서 단독정부 반대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때 동참한 사람이 지서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예비검속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는데,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 서장이 총살 명령을 거부해 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지금도 제주4·3과 경찰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산지서 앞에는 현재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가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무장 폭도' 등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거나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설명되어 있지 않은 등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빨리 표지석 내용의 정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우뭇개동산입니다. 우뭇개동산은 성산일출봉 매표소에서 북쪽 샛길로 나가 보이는 무대와 잔디광장 일대입니다. 이곳은 1949년 1월 2연대 군인들과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오조리 주민 30여명을 집단 총살한 장소입니다. 해방 이후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는 고기잡이용으로 쓰이기도 했고, 1948년 겨울철부터 각 마을마다 민보단 등을 꾸려 다이너마이트는 인민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한 마을 경비용으로 마을 초소마다 보관돼 있었습니다. 2연대보다 앞서 제주에 주둔했던 9연대는 마을 경비를 위해 주민들의 다이너마이트 사용을 허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고 주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연대가 주민들을 학살하게 된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 사건(또는 던지기약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성산면 오조리 주민들의 가장 많은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뭇개동산에는 이런 사건을 알 수 있는 안내판 등이 전혀 설치되어있지 않습니다.
제주도의 모든 곳이 4·3 유적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4·3은 제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뭇개동산처럼 그 흔적과 기록이 알려지지 않은 장소가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만을 눈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얽힌 역사를 알고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