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민주여성회> 제주 기행 이야기 후기 바로가기
1일차 제주4·3 평화공원
2일차 강정마을
3일차
① 선흘 주민에게 듣는 4·3 이야기
② 동백동산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역사
선흘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슬픈 역사가 깃든 동백동산
<오월민주여성회> 회원들은 선흘 곶자왈 동백동산에서 선흘의 자연과 역사를 만났습니다.
'곶'은 산 밑의 우거진 숲이고, '자왈'은 사람이나 마소가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숲의 나무들과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크러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곶자왈은 이 두 단어를 합친 신조어로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말입니다. 곶자왈은 제주도의 동부, 서부, 북부에 걸쳐 넓게 분포하며, 지하수 함량이 풍부하고 보온, 보습 효과가 뛰어나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입니다.
특히 선흘 곶자왈 중에서도 동백동산에는 중심에 곶자왈 용암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주변으로는 빌레용암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빌레용암의 영향으로 동백동산에는 곶자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연못과 동굴이 많습니다.
이러한 동백동산의 동굴들은 4.3 당시에도 많은 선흘 주민들을 숨겨주었고, 연못에서 주민들은 물을 길어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를 기억하는 선흘 주민들은 숲의 여러가지 기능 중에서도 '사람들을 숨겨주고 품어주는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동굴들 역시 발각되어 학살의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곳 도틀굴에서는 당시 약 20여명의 주민들이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학살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도틀굴에 대한 설명 후, 이 곳에서 돌아가신 선흘 주민들을 생각하며 다같이 묵념했습니다.
잠시의 묵념이 끝나고 설명을 진행했던 고제량 생태관광협회 대표님이 말했습니다.
"우리 묵념하는 동안 잠깐 바람이 다녀갔지요. 느끼셨나요?"
주민들에게 없어선 안 될 터전이었던 숲. 그리고 제주4.3 당시에는 주민들을 숨겨주었던 숲. 하지만 발각되어 비극의 장소가 되어버린 곳. 이후에도 계속된 연좌제와 강요된 침묵으로 말할 수 없었던 숲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한동안 주민들은 산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합니다. 이념에 압도된 사회분위기가 산에서의 기억을 꺼내고 말하기 더 어렵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너무 긴 시간이 지나서야 주민들은 서서히 4.3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름답고 가치있는 곶자왈 동백동산과 함께 선흘은 생태마을을 꾸려 살게 되면서 숲과 화해하고 다시 함께, 숲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흘에는 1970년대 후반에야 수도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 물은 너무 적고 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전 제주에서는 '물부조'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웃에 잔치와 같은 행사가 있으면 물을 길어다가 서로 물을 후원해주는 풍습이었습니다.
4·3 당시 숲속 동굴에서 은신하며 지내는 동안 물은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도틀물과 같은 곳에서도 물을 길어다 먹었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 몇 명이 먼저 떠가면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른 새벽 네시쯤부터 옆집에서 다른 사람이 물 길러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급히 따라나가곤 했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물이 없어서, 몇 고개 넘어 먼 곳에 있는 '먼물깍'으로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고, 먼물깍에도 물이 없으면 옆마을까지 가서 물을 구해와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물을 길어오는 일은 모두 당시 여성들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옛날 제주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어서 물은 여성이 구해와야 했습니다. 간혹 집안에 여성이 없고, 남성이 물을 구해와야 되는 경우에는 남자들이 여장을 하고 물을 길으러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산 속 연못 등에서 길어온 물을 마실 때는 물을 담아놓은 항아리를 한번 퉁 치고나서 마셨다고 합니다. 물 위에 떠있는 이물질들이 잠깐이라도 가라앉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또 연못 물에 섞여있는 개구리알, 모기유충 등을 차마 보면서 마시기 힘들어서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백동산의 숲 해설가 분들은 방문객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이름이 선흘 ‘동백동산’인데 왜 크고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없고 가지가 가느다란 동백나무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주4.3이 끝나고 선흘 주민들이 몇 년 뒤 마을로 다시 돌아왔을 때, 집과 마을이 불타서 거의 다 사라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곳 숲의 동백나무들을 날라다가 집을 짓고 마을을 다시 만들었습니다.이 숲의 굵고 오래된 나무들 덕에 마을은 사라지지 않고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동백나무들은 그 이후에 다시 심은 나무들입니다. 그래서 이 곳의 동백나무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나무들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곶자왈을 일컬어 나무와 돌, 덩굴들이 얽혀 치열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는 현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곶자왈의 나무들은 돌 위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일반 흙 속으로 깊이 뿌리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감싸며 넓게 뿌리 내리게 되면서 지지기반이 약해서 뿌리째 뽑혀 옆으로 누운 나무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나무가 쪼개지게 되면 그 곳에서는 한 뿌리에서 다시 두 그루의 나무가 갈라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네 그루의 나무가 갈라져 나왔다면 두 번 잘라진 것이지요.
4.3의 아픔을 오롯이 삶으로 겪으며 지나온 제주사람들과도 닮아 보였습니다. 삶이 뿌리 채 흔들리고 뽑혀도, 폐허 같은 상처에서 다시 삶을 살아낸 힘은 뭐라고 표현할 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담긴 말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제주사람들의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주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 중에 "살암시민 살아진다", "살암시난 살앗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다보니 살게 되었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생명의 숲 곶자왈, 그 곳의 나무들이 제주 사람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며 그 자리를 같이 지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