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4일~15일, 전교조 인천지부 선생님들께서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4.3 기행에 참여하셨습니다. "제주도민이 겪었던 4.3 항쟁의 역사와 마음 속 한을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아픔의 역사에서 희망의 출발로", "너무 뜻깊은 기행이었습니다" 라는 후기부터 "계속 제주다크투어를 응원합니다", "제주다크투어 건투를 빕니다!"라는 응원의 메세지까지. 저희도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힘과 용기를 얻은 기행이었습니다 ^^ 참석하신 분들 중 상인천중학교 한현숙 선생님께서 자세히 후기를 써주셨습니다. 허락을 받아 아래와 같이 공유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의 평화기행
1일차 : 아프지만 그날의 상처 잊지않으리
2일차 : 억울한 죽음 아닌 의로운 죽음으로
일요일 아침 찾은 ‘제주 안덕 동광마을 4·3길’은 ‘동광리 복지회관’에서 시작된다. 1948년 11월 동광리가 토벌대에 의해 완전 초토화 된 후 사람들은 ‘큰넓궤’로 피신하여 2 개월가량을 숨어 지냈으나 발각되자 다시 한라산을 향해 무작정 몸을 피한다. 그러나 모두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총살되거나 서귀포로 끌려가 정방폭포와 그 인근에서 학살된다. ‘임문숙 가족 헛묘’는 이 때 희생된 ‘임문숙 씨’ 가족 묘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신 없는 ‘헛봉분’이다. 시신이라도 찾아 영혼을 달래는 일도 이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희생자 9명의 봉분 7기(2기는 합묘)가 조성되어 있다. 무엇으로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풀꽃은 귀엽게 피었건만 억울한 영혼들과 유족들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버스를 타고 대정고을에 이르니 낯익은 ‘돌하르방’이 서있다. 그 옆에는 세 장두(이재수, 오대현, 강우백)를 기리는 ‘제주대정삼의사비’가 있는데, 비석 뒤에 적힌 긴 사설조의 설명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1901년 정부의 부패와 일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 맞서 봉기한 제주 ‘이재수의 난’의 세 장두를 기리기 위해 60년이 지난 1961년에 세워졌는데 현재 자리(추사기념관 앞 쪽 도로)의 기념비는 1997년 대정고을연합회 주체로 다시 세워졌다 한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도들과 제주 민중 사이의 충돌로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문제로까지 커진 제주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
‘대정 4·3사건 위령비’와 ‘목사 조남순, 면장 김남원 공덕비’가 ‘경찰서장 문형순’ 공덕비와 나란히 서 있다. 해설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쉰들러 리스트’를 떠올렸다. ‘좌익’이 뭔지 모르고, 그저 산(山)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빼앗기다시피 주었을 뿐인데도 ‘좌익명단’에 올려 총알을 겨누려 했으니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이들은 당시 좌익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에게 자수를 권고하고, 죄 없음을 ‘서장 문형순’에게 사정하는 등 각자의 위치에서 ‘제주 대정’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다. ‘문형순’ 공덕비에 관한 진실공방 인터넷 기사를 보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4·3의 아픔과 혼란이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섯알오름’으로 이동하는 바깥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내리자마자 보이는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는 주위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내무부 치안부가 ‘예비검속법’을 악용하여 모슬포 경찰 관내 344명을 잡아들여 집단학살하고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 ‘섯알오름’이다, 3차례에 걸쳐 법적인 절차도 없이 무고한 양민(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 학생 등)들을 검속, 감금하여 무참하게 집단학살을 자행한 곳이다. 이후 유족들에 의해 수습된 시신은 ‘만벵디 묘역(한림읍 금악리)’에 안치되었는데, 특히 구별이 어려운 132명의 시신은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이라는 뜻의 ‘백조일손묘역’(백조일손지지)에 안장되었다. ‘섯알오름’ 학살터 주변에 조성된 위령공원 안의 ‘희생자 추모비’ 앞의 검정 고무신이 그 날의 무고한 양민들의 마지막 발걸음인 양 아프게 올라 있었다.
끔찍한 학살 현상 ‘위령공원’을 끼고 ‘섯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에 올랐다. ‘알뜨르 비행장 고사포 진지’는 일제 강점기에 미군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전략적 군사 시설이다. 이곳에 설치되었던 포대는 폭파 제거되었으나, 남아있는 콘크리트 흔적은 충분히 고사포 진지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제주 현장에 모두 둘러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달려 ‘진아영 할머니(무명천 할머니)’의 삶터를 보기 위해 ‘제주 월령리’ 바닷가로 향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진아영 할머니’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30대 젊은 나이에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총탄에 맞아 참혹한 인생을 살다 가신 할머니는 ‘4·3’의 참혹함과 억울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할머니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소박한 공간에서 왜 ‘무명천 할머니’라 불렸는지를 확인하니 소름이 끼치며 눈물이 나왔다. 총탄에 턱이 날아간 몸으로 살아난 것도 기적적이지만, 평생을 고단한 몸으로, 먹거리 한번 제대로 씹지 못 한 채로 살아낸 인생이 그저 비현실적이라 생전 할머니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이곳에 와서야, 오늘이 되어서야 할머니의 존재를 알다니 얼마나 4·3에 대해 무심했었는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마당에 핀 소복한 국화 옆에 ‘최상돈’선생님의 시가 할머니를 위로해 주는 듯 했다. 영상에서 그려지는 것과는 달리 끔찍한 일생을 사셨으면서도 밝은 분이었다고 한다. 마당에 둘러앉은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판소리를 감상하며 할머니를 생각했다. 아마 이런 환한 모습을 보면 좋아하시리라……. 부디 온전한 몸으로 마음껏 노래 부르고, 마음껏 행복하시길 할머니 영전에 기도드렸다.
‘월령리’ 바닷가도 역시 멋진 모습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바닷가를 걷기도 하고, 해변의 멋스런 카페에 들러 커피도 마시며 놀란 가슴을 풀어냈다. 자연이 주는 치유에 몸을 맡겨 마음을 다독이었다.
이제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해야 한다. 아쉬운 마음 한 가득이다.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최상돈’ 선생님이 일정에 없는 ‘도두봉’ 오르기를 제안하셨다. ‘섬머리 도두봉’에 올라 일몰을 보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함이다. 물론 꼬박 이틀 동안 안전운전으로 도움을 준 버스기사님의 또 다른 배려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가파른 ‘도두봉’에 오르자마자 바다 끝 저 멀리 일몰이 우리를 환호성 지르게 했다.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우리가 이틀 동안 보았던 일정들이 부드럽게 화해하고 결국은 상생의 길로 가야함을 저 지는 태양이 알려주는 듯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제주를 떠났다.
‘4·3 공원 위패봉안소’ 방명록에 적었던 문장을 기억한다.
‘잊지 않겠습니다.
잘 배워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소서.’
좀 더 바른 세상으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제주 동백꽃은 이제 내게도 절대 지지않는 붉은 꽃으로 4•3을 상징하는 화해와 상생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