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은 제주4·3을 한국 대중들에게 처음 알리다시피 한 작품이었습니다. 4·3 당시 북촌대학살을 배경으로 한 "순이삼촌"의 이야기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촌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고, 가족사이기도 하고 또한 마을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7월 21일(토) 제주다크투어는 "4·3 유족과 함께 걷는 북촌 4·3길 - 순이삼촌의 발자국을 찾아서" 기행을 진행했습니다.
북촌 기행 해설을 맡아주신 이상언 님은 북촌마을에서 나고 자란 북촌 토박이 해설사이십니다. 북촌대학살로 인해 할아버지와 고모가 돌아가신 4·3 유족이기도 합니다. 비극의 역사가 곧 가족사이기도 했던 이상언 해설사님은 아픔의 역사를 직면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과 교훈을 전승해가는 일을 하면서 전 4·3희생자 유족회 청년회장, 4·3 명예교사 등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북촌마을은 제주시 동쪽 조천읍에 자리한 해안마을입니다. 대토벌 시기에 피해를 입은 곳들은 대부분 중산간 마을인데 북촌은 해안마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너무나 컸던 곳이었습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마을의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피살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을에서는 이를 두고 고민하다가 곧 마을의 원로 몇 사람이 수레에 시신을 싣고 함덕에 주둔해있던 2연대 부대로 직접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그 원로들 중 경찰가족이었던 한 명만을 제외하고 모두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맙니다. 그 때 돌아가신 원로 중 한 분이 이상언 해설사의 할아버지셨습니다. 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북촌마을로 들어와 마을 주민 이틀 만에 약 5백여 명을 보복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49년 1월 17일,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 군인가족, 경찰가족만 나오라고 한 다음 나머지를 30명~50명 단위로 끌고 가 현재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는 옴팡밭과 당팟 등에서 사람들을 집단학살했습니다. 군인들이 사격 경험을 쌓기 위한 일환으로 주민들을 한명씩 쏴서 죽였다는, 잔인한 만행을 증언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약 300~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최근에 그 숫자는 500명 이상까지 올라갑니다.
장기간에 걸쳐서가 아니라 단 며칠 안에 5백여 명의 주민이 희생됐다는 점이 다른 피해마을과 북촌마을의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북촌은 같은 날에 온 동네 집집마다 제사연기가 피어오릅니다.
70년 전 4·3 당시 참극의 아수라장이었던 북촌 초등학교는 이후 1954년 북촌리 '아이고사건'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1954년 1월 23일, 제주도 조천읍 북촌리 마을청년 김석태가 군대에서 죽어 마을장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신 대신 죽은 이의 옷을 꽃상여에 넣고 생전에 살던 곳, 놀았던 곳을 찾아다니며 '꽃놀임'이라는 의식을 치르며 북촌 초등학교에도 들렀는데, 함께 한 주민들은 불과 5년 전 그 자리에서 있었던 수많은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그날을 생각하며 동네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여기서 그 때 죽은 조상들을 위해 술 한 잔 올리자’고 제안하였고 ‘아이고’ 곡소리가 절로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추모의 의식마저 경찰 상부에 보고되고 경찰은 이를 엄벌했습니다. 이장을 비롯한 몇 명이 경찰에 불려가 고초들 당하고 다시는 4·3을 추모하거나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와야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 사건을 ‘아이고 사건’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촌 사람들은 더 숨죽인 세월을 살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등 민주화운동 시기에 접어들고서야 4·3진상규명이 본격화되고, 북촌리 아이고 사건도 조금씩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상언 해설사님은 추모의식 조차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나누는 일 조차도 입막음 당했던 사건인 '아이고 사건'은 북촌역사에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있어서도 참 중요하고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짚어주셨습니다.
마당궤는 4·3 당시 북촌마을 주민들이 숨었던 은신처 중 한 곳이었습니다. 북촌포구 경찰관 피습사건으로 토벌대의 수색이 강화된 1948년 6월 22일, 이곳 ‘마당궤’에 숨어있던 북촌마을 청년 9명이 발각되어 제주경찰서에 연행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후 육지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 그 날 수색은 경찰과 미군이 같이 참여했다는 증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1948년 6월 16일 우도에서 출발하여 제주읍으로 향하던 한 척의 배가 갑자기 몰아친 풍랑 때문에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순경을 포함한 가족 13명이 동승하고 있었다. 당시 지서장은 북촌포구에 들어서면서 고기떼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이 총소리를 듣고 접근한 무장대에 의해 경찰 2명이 희생되었다.
서우봉은 서모봉, 서산이라고도 불리는 오름입니다. 봉우리를 기점으로 동쪽은 북촌리 서쪽은 함덕리에 자리잡고 있고, 북촌에 속한 오름 동쪽 면적이 서우봉 전체의 3/4 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서우봉에는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해안절벽쪽에 '몬주기알'이라는 동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비교적 넓은 천연동굴이어서, 4·3당시 북촌주민들 뿐만 아니라 함덕주민들도 숨었던 장소였습니다.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1948년 12월 26일경 4~5명의 여성들이 절벽 위에서 총살당하는 등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었습니다. 토벌대는 몬주기알에 숨어있던 여성들에게 신체 훼손 등의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상언 해설사님의 고모님도 이 몬주기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몇 년 전, 이상언 해설사님은 몬주기알에서 살아나온 생존자 분과 직접 몬주기알을 찾아나섰는데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4·3 생존희생자로서 당시를 증언해주기도 하시는 북촌리 고완순 노인회장님도 이모님이 몬주기알에서 돌아가셨는데, 평소엔 잘 안 하셨던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면서 우시던 모습이 종종 마음 아프게 떠오르곤 합니다.
일제 진지동굴을 만드는 데에도 제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곡괭이 정도를 든 맨손으로 수많은 동굴을 파며 고초를 겪었습니다. 질곡과 광풍의 역사를 매번 맨손으로 마주했을 사람들. 저항과 수난의 역사를 길어올리며 또 다시 맨손으로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과 공동체를 재건해온 제주사람들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는 곳이 북촌이기도 했습니다.
제주의 어느 유명하고 화려한 관광지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단출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마을의 모습, 그리고 마을 곳곳의 이야기를 귀하게 여기고 전해주시는 해설사님이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마을 주민의 목소리로 직접 마을의 이야기를 듣는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시간, 그리고 공간이 어떻게 잘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