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는 2023년에 도보로 가능한 2건의 투어코스를 더 공개했다.
첫번째는 '걸어서 봉개리 다크투어'로 2022년에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에서 발간한 '봉개동 4·3유적지 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마련하였다. 봉개동은 제주4·3평화공원이 있어 4·3 역사의 중심 공간이지만, 정작 봉개동의 4·3 유적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되거나 알려진바가 없어 알릴 필요가 있어 신규 코스로 채택되었다.
두번째는 '걸어서 성산리 다크투어'로 이번에 다녀온 코스로 지난해 9월 일일기행으로 기획했다가 만족도가 높고, 인권의식을 고치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신설되었다. 11월 5일 성산읍4·3위령제가 봉행했기도 하고 1년 만에 다시 성산리를 걸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2023년의 마지막 일일기행을 정하였다.
성산리 기행은 터진목 또는 광치기해변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성산읍 4·3희생자 추모공원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성산읍 일대의 도민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던 대표적인 학살터이다. 2010년 이곳에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읍단위, 제법 큰 규모의 위령제를 매년 11월 5일에 봉행해왔다. 이곳 위령비에는 추모글과 함께 성산면 4·3희생자 467위의 이름이 마을별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곳은 검은모래 해변에서 아름다운 성산일출봉을 바라볼 수 있는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이번 투어의 해설을 나선 양성주 제주다크투어 대표는 "아마 전국,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위령공간 일 것"이라고 평했다. 이런 절경이 펼쳐진 공간이 아무런 죄 없는 도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던 공간이라는 것이 참여자들에게 더욱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바다 위 빛나는 윤슬, 무심하게 너울지는 파도가 아름답지만 동시 슬픈.. 그래서 이곳에서 4·3의 역사를 확인하고 나면 이제 이곳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비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 이곳에서 총살되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제주4‧3생존희생자후유장애인협회 회장이기도 오인권씨는 제주4·3이 시작된 1947년에 태어나 생후 17개월이던 1949년 2월 1일 터진목에서 세 발의 총탄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어머니는 25세에 갓난 아들만 남기고 총탄에 쓰러졌다. 그의 아버지도 제주4·3 당시 집단학살 매장지인 제주공항에서 2014년 유해발굴됐다. 언론을 통해 오씨는 "나에게는 '삶이 고통'이란 말도 행복한 말일뿐, 그야말로 끔찍했다"고 지난 삶을 회고하기도 했다. 터진목에 잡혀온 또 다른 모자는 총살을 앞두고 아들 어머니에게 본인이 만세를 외치면 앞으로 엎어지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아들은 토벌대에게 만세삼창을 외친후 총을 쏴달라는 부탁을 하고, 만세를 외치자 마자, 어머니를 덮치며 총에 맞고 쓰러졌다. 시간이 흘러 아들의 피를 덮어쓴채 살아남은 이 여성은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헤매다가 근처 절에 찾아가 살려달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의 중은 그녀를 살려줬다가 후에 피해를 볼 것이 두려웠는지토벌대에 이를 알렸다. 그런데 당시 토벌대는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그녀의 운명이라며 살려줬다고 한다.
최근 광치기해변 공영주차장이 추모공원 맞은편에 조성되어 이제 주차를 편하게 하고 이곳을 방문할 수 있다. 우리가 제주를 단순 관광지로만 소비하기보다는 우리의 역사와 삶의 많은 영향을 미친 75년 전의 아픔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광치기 해변의 아름다움과 함께 터진목의 아픈 역사를 함께 확인할 기회를 갖기를 추천드린다.
광치기해변을 지나 성산일출봉 아래 수마포 해변에 가면 성산일출봉 일제진지동굴이 있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본군은 미군의 일본 본토 침략의 시점을 늦추기 위한 결사항전의 작전 중 하나로 제주도에 더 많은 군자원을 집중시켰다. 그 중 하나로 해안가 절벽에 진지동굴을 만들어 개인잠수정을 숨겼다가 적군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성산일출봉 말고도 별도봉, 송악산 등에도 해안과 맞닿은 절벽에 일제진지동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진지동굴은 일본군이 자체적으로 건설한 것이 아니다. 상당히 많은 제주도민이 동원되었고, 그마저도 모자라 육지부의 사람들까지 동원하였고, 그 과정에서도 많은 피해가 존재했다.
서북청년회는 제주4‧3의 역사, 제주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공권력을 뛰어넘는 피해를 입힌 집단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경찰과 군인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다가 어느 순간 군경도 통제하지 못할 수준의 폭압의 주체가 되었다. 성산리에도 주로 군경토벌대가 도민들을 통제하다가 100여 명의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성산동 국민학교에 약 3개월간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학교 건물에 머물면서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은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자창고를 이용했다. 지금도 이 곳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매일 같이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는 비명소리와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아직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폐허로 방치된 상태다. 주변에 계속 신규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어 보존을 위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훼손될 위기에 처해있다. 지난해 말 이곳을 알리는 유적지 안내판이 생겼는데, 사유지를 피해 안내판이 설치되다보니 안내판의 위치에서는 이 서청특별중대의 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안내판에 실제 유적지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리는 추가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제주다크투어도 지난해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에서 같은 내용을 지적했고, 서청특별중대터가 더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성산파출소가 있는 곳에는 4‧3때도 성산지서가 있었다. 성산지서는 제주4·3이 발발한 1948년 4월 3일 새벽 인민유격대의 습격을 받은 12개 경찰서 중 하나이다. 당시 성산지서에는 총 14명의 경찰관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습격 당시에는 3명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인민유격대 40여 명이 99식 총 2정을 갖고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이 응사하자 모두 퇴각해 피해는 입지 않았다. 이에 보수단체에서는 경찰서 앞에 표지석을 세워 당시 습격을 시도한 인민유격대를 '폭도'로 명명하여 경찰의 피해사실만 적시해놨다. 인민유격대에 의한 경찰지서의 피해도 있었으나, 경찰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는 더 크고 많았는데, 다분히 편협한 정보만 돌에 새겨놨기 때문에 제주다크투어는 이 표지석을 없애야 한다고 지적을 해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제주에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성산지서에도 예비검속자의 일부를 총살하라는 군의 지시가 하달됐으나,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이 이 명령에 대해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 이라며 거부해 많은 도민들이 목숨을 건졌다.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이런 의인들의 선택이 얼마나 의미있는 결과를 만드는지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문형순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선택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권을 훼손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성산일출봉 우뭇개동산이다. 성산일출봉 매표소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하면 우뭇개 해변이 나온다. 그 옆에 있는 언덕이 우뭇개동산이다. 이곳은 1949년 1월 2일 2연대 군인들과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오조리 주민 30여명을 ‘다이너마이트 사건(또는 던지기약 사건)’으로 집단 총살한 곳이다. 토벌대는 오조리 주민들이 다이너마이트로 자신들을 죽이려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희생자는 마을 이장, 민보단장 등 2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성산면 오조리 주민들의 가장 많은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기록됐다.
해방 이후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는 고기잡이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 1948년 겨울철부터 각 마을마다 민보단 등을 꾸려 다이너마이트는 인민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한 마을 경비용으로 마을 초소마다 보관돼 있었다. 2연대보다 앞서 제주에 주둔했던 9연대는 마을 경비를 위해 주민들의 다이너마이트 사용을 허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고 주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연대가 주민들을 학살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도 최근에 유적지 안내판이 생겼다. 그런데 역시나 안내판의 위치가 애매하다. 실제 우뭇개동산 근처에 있지 않고, 공영주차장에서 성산일출봉에서 진입로로 들어오는 길 한켠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성산일출봉 일대가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면서 관리 주최가 제주도가 아닌 문화재청이 되다보니 안내판 설치에도 허가를 받지 못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4·3유적지도 국가 지정문화재와 같이 적극적으로 보존과 기록의 대상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성산리를 이렇게 걸으니 그전에 알던 성산리가 다르게 보인다. 잔인한 역사에 슬픔에 잠기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에 슬픔을 녹여내는 진귀한 경험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