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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적·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이념과 물리적 경계로 타인을 분리해왔다. 강호진 제주다크투어 이사님의 해설과 함께한 이번 원도심 투어는, 특히 1947년과 1948년을 전후해 군·경과 권력이 제주도민을 분류하고 통제하며 국가폭력을 행사했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갈등과 화해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 뒤,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이 별다른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나려 하자 군중이 항의했고,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의 징후로 오인해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이른바 ‘3·1절 발포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쳤다. 이후 3월 10일에는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민·관 총파업이 일어났지만, 미군정은 책임자 처벌이나 진상규명보다 강경한 치안 진압과 대규모 검거를 택했다. 이 사건은 제주4·3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관덕정에서 시작된 기행. (2026. 09. 19. 촬영)
관덕정에서 시작된 기행. (2026. 09. 19. 촬영)

기관의 이중성

옛 제주도립병원은 1948년 당시 조천지서에서 조사 과정 중 가혹한 고문으로 사망한 21세 청년 김용철의 사체 검사와 관련된 장소로 기억된다. 당시 부검에 참여한 의사 장시영은 김용철의 사망 원인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 죽음은 제주도민의 분노를 더욱 키우며 4·3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편 이 병원은 4·3 당시 강경 진압과 민간인 학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정보참모 탁성록에게 아편 주사를 제공한 곳으로도 언급된다. 당시 제주도립 제주의원 경리주임이었던 하두용의 증언에는 탁성록이 반복적으로 아편 주사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병원은 본래 생명을 돌보는 기관이지만, 국가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는 그 구성원과 자원이 폭력의 체계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장소는 상기 시킨다.

도립병원 옛터에서. (2026. 09. 19. 촬영)
도립병원 옛터에서. (2026. 09. 19. 촬영)

이념과 교육의 영향

잠시 쉬어 간 <풍류> 카페에서 이어진 강 이사님의 해설은 역사의 복잡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제도와 기관의 역할뿐 아니라, 교사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함께 생각해 볼 문제였다.

4·3무장대의 지도자로 알려진 김달삼(이승진)과 이덕구는 남조선노동당 제주위원회의 활동가였으며, 각각 대정중학원과 조천중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경험을 지닌 지식인이었고, 이덕구는 지역 유지 집안 출신이기도 했다. 이들은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사회주의 사상 및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논의했다. 실제로 이후 무장대로 산에 올라간 인원 중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거나 군·경의 탄압을 피해 입산한 10대 청소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청년과 학생들이 식민지 해방 이후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운동에 깊이 노출되어 있었다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군정기에는 체포된 이들이 재판을 받더라도 한국인이 아닌 미군정 법관의 관할 아래 놓이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이후 군사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의 혐의와 형량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결정된 사례들도 알려져 있다. 개인의 삶과 정치적 입장을 단순한 범주로 환원해 처벌하는 이러한 폭력적 분류는 4·3 이후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더욱 대규모로 이어졌다.


인간 분류 공장

강 이사님은 투어 중 제주성 안과 밖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던 공간적·사회적 경계를 강조했다.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은 4·3 당시 민간인 분류를 위한 수용소로 활용된 대표적 장소다. 초토화 작전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가 1949년 봄 귀순한 주민들은 경찰과 군에 인계되어 이곳에 수용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는 부상자와 임산부도 있었으며, 많은 청년은 취조와 군사재판을 거쳐 부산·대전·서울 서대문 등 육지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에는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제주도민들이 다시 주정공장 등에 구금되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들 가운데 일부는 제주항 앞바다에서 집단 수장되었고, 육지부 형무소로 이송된 이들 중 다수도 전쟁 초기 집단희생을 당했다. 주정공장은 단순한 산업 시설이 아니라, 국가가 주민을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가두며 제거했던 폭력의 공간이었다.

주정공장 옛터 역사기념관에서. (2026. 09. 19. 촬영)
주정공장 옛터 역사기념관에서. (2026. 09. 19. 촬영)

앞서 살펴보았듯 국가폭력은 사람들을 이념과 신분, 공간의 경계에 따라 나누어 왔다. 관덕정, 옛 제주도립병원 터, 주정공장 옛터 등 제주 원도심의 역사 공간을 걸으며 4·3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시민의 자주성과 존엄이 보호되기 위해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 오늘날에도 이념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분리시키는 정치·언론·종교·문화의 일방적 언어를 넘어, 서로의 역사와 상처를 이해하려는 상호적 소통과 대화가 더 넓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시 관덕정에서 모여 기행을 마무리하며 단체사진. (2026. 09. 19. 촬영)
다시 관덕정에서 모여 기행을 마무리하며 단체사진. (2026. 09. 19.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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