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인권기행 첫 날, 제주공항에서 만나 단체버스를 타고 인사를 나눴다. 은두 님의 인사를 통해 그제야 제주다크투어가 여행사가 아니라 비영리단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전혀 몰랐다가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5·18 민주화운동의 광주가 그랬듯 4·3의 제주 역시 학교와 방송이 전혀 알려주지 않았고. 내가 제주를 관광지가 아니라, 항쟁 그리고 수난의 섬으로 인지하게 된 시간은 길지 않다.
‘장두’의 역사로 읽어본 역사 속 제주정신
제주 4·3평화공원으로 갔다. 기념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제주 저항의 전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 속의 민중 저항’관이다. 착취와 억압이 극에 달하면 제주사람들은 일어섰고 그 앞에 장두가 있었다. 한양으로 쳐들어가 왕권을 빼앗지 못하는 한 늘 민란은 평정되기 마련. 저항 끝에 얻어내는 약간의 결실은 있었더라도, 대부분은 항상 장두가 본보기로 처형당하는 마무리였다. 많이 배운 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의 결기. 장두가 자신의 목을 내어놓고 지켜내 온 것이 역사 속 제주정신이요, 바로 인간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촌마을에 가서는 너븐숭이 기념관 근처 피가 흥건한 학살 터였던 옴팡밭(오목하게 들어간 밭)과 당팟(당과 가까운 밭)을 보고, 애기무덤에 돋아난 처연한 풀들을 가슴에 담았다. 널브러져 있던 시신의 모양새는 비석으로 만들어 뉘고, 뿜어져 나오던 피는 붉은 화산송이로 깔아 놓은 ‘순이 삼촌 문학비’에서 처참했을 그 날을 희미하게 떠올리기도 했다.
젖어오는 안개비, 이 섬의 슬픔이려나
본향당인 가릿당(구짓머루당)에 들르고, 지금의 등대 격인 도대불에 난 총탄의 흔적도 더듬었다. 북촌포구의 방파제 너머 보이는 다려도는 배를 타고 가서 숨었던 곳이라 한다. 제주사람들은 제나라 군인들의 총구를 피해 섬 속의 섬으로, 산으로 동굴로 숨어들어야 했고 끌려 나와 도살되듯 죽어 나가야 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저들이 친일파와 서북청년단을 이용해 국가라는 이름으로 학살한 죽음의 억울함이, 내리는 안개비처럼 가슴에 젖어 들었다.
이튿날에는 강정마을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로 가서 ‘멸치’를 만났다. 멸치는 해군기지가 지어진 뒤에 마을에 들어온 강정지킴이라고 했다. 해군기지를 반대한 건 기지가 지어진 뒤 일어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이니. 해군기지가 지어졌다고 싸움은 끝난 게 아니라 정작 시작이란다.
제주 섬 전체의 군사기지화 – 일제 강점기에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이야기
강정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줄 알았는데 딱 한군데를 찾았다. 해군기지가 내려다보이는 포인트. 해군기지 찬성· 반대로 강정마을 주민들을 갈라버리고는 다시 돈을 풀어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있는 정부 이야기며, 무시무시한 핵잠수함과 그 부산물 이야기며, 기만적인 국제관함식 강행 이야기를 접했다. 제주 전체를 군사기지화 하려던 것은 일제 강점기의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다시 확인했다.
매일 이어오는, 오전 11시 강정 생명평화미사와 정오 인간띠잇기에 참가했다. 미사에서 주민 정선녀 씨(평화센터장)가 이렇게 찾아와 주는 연대의 마음에 또 힘을 낸다고 말하니 마음 한쪽이 묵직해졌다.
점심을 먹고 송악산 인근에 있는 알오름에 올랐다. 서쪽 섯알오름, 가운데 셋알오름, 동쪽 동알오름. 일제 강점기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를 보고, 6·25 전쟁 때 ‘예비 검속’으로 집단학살당한 희생 터에 머물다가, 고사포 진지도 둘러보고, 송악산 해변에 일제가 자살어뢰 작전을 준비하며 뚫어놓은 진지동굴도 먼 눈으로 살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가 일본군이 탄약고로 사용했던 장소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일제가 일본 본토를 지키려는 최후의 저항기지로 만들려던 제주를, 일제 패망 후 권력에 눈먼 자들이 제주를 빨갱이의 섬(‘red island’)으로 몰아 초토화한 형국이 섯알오름에 담겨있는 셈이다.
섯알오름에 담긴 사람과 역사의 비극
학살터에서 희생영령들의 묘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조일손지지. 6년 동안이나 당국이 시신 수습 조차 막아서 엉키고 섞여 있는 뼈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기에. 함께 묻고 한 자손이 되기로 한 묘역. 어렵게 건립한 위령비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에 의해 부서져야 했다. 올해가 4·3 70주년인데 4·3을 입에 올리는 건 20년 안팎의 일이라 한다. 조각조각 한 집 한 집 몰래 가져갔다가 깨진 채로 다시 모아놓은 위령비는. 시신을 찾지도, 피해를 말하지도, 울음을 소리내어 울지도 못한 세월의 아픔, 아픔을 겨우 드러냈다가 철퇴를 맞은 공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진통제도 듣지 않는 마음의 아픔은 다 어찌했을까-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양분도 없어보이는 돌담에 신기하게도 백년초가 무더기로 자라는 곳. 선인장의 질긴 생명력처럼 살아낸, 진아영 할머니의 삶터도 방문했다. 서른다섯 살에 토벌대가 쏜 총탄에 턱이 날아가 제대로 씹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소화불량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아흔 살까지 살아내셨다 한다. 턱이 있을 자리를 무명천으로 감싸 묶고 몸의 고통은 진통제로 버텨냈지만, 가슴의 아픔은 무엇으로 견뎌내셨을까. 할머니 방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할머니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말씀을 제대로 못 하시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우시는 모습. 우리 모두 할머니의 아픔을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었다.
셋째 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정방폭포에 물 무지개가 아름다웠다.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의 생존희생자 홍춘호 삼촌(어른)과 동광리 4·3길을 걸었다. 걸으며 쉬지도 않으시고, 그늘에 멈춰 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땐 앉지도 않으셨다. 여든한 살에도 정정하셔서 다행이었지만 열한 살에 겪은 일은 참으로 참혹했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마을 사람들은 큰넓궤(동굴)에 숨어 지내다 발각이 돼서 다른 곳으로 피해야 했단다. 눈에 발자국을 남긴 다른 마을(삼밧구석) 주민들은 볼레오름 근처에서 총살되거나 정방폭포에서 학살당했단다. 아까. 그렇게 아름다웠던 정방폭포에서 굴비 두름 엮듯 묶어서 앞줄에 선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려 연줄연줄 같이 빠져 죽게 했단다.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듣게되는 이야기
동굴에 숨어 범벅 하나로 끼니를 때워도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이기에 배고픔조차 못 느끼다가. 귀순하라는 삐라를 보고 내려가 경찰지서에서 갇혀 지낼 땐 너무 허기가 져서 주변의 풀 한 포기, 해초 한 줌 남기지 않았다던 홍춘호 삼촌의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했다.
뺏으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운 곳- 제주를 생각한다
제주에서 돌아왔지만, 드라마 ‘송곳’ 몰아보기를 하며 다시 제주가 떠오른다.
“인간이 인간한테 어떻게 이리 독하게 구나 싶죠? 우리 인간 아니오. 그 사람들한테 우리는 책상에 앉아 더했다 뺐다 하는 종이에 박힌 숫자고, 시키는 대로 하다가 새끼나 낳아 길러서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가축이오. 뺏어도 반격하지 않고 때려도 화내지 않으니까. 두렵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요. 살아있는 인간은 뺏으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뺏으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운 곳, 제주를 생각한다. 47년 제주읍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만 3만여 명이 운집한 곳, 기념대회 발포 등에 항의해 일부 경찰관을 포함 도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을 이뤄낸 곳. 남한 단독정부수립 선거를 유일하게 무산시킨 곳.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저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곳이 제주였음을 기억한다.
‘아픔은 길이 된다’
내가 당시에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안 된다며 사람들을 산으로 이끌었을까. 숨어 지내다 발각되어 ‘너만은 살려줄 테니 은신처를 불어라’라는 겁박를 거부하고 희생당했을까. 내가 살려고 토벌대를 이끌고 오다 동굴 앞에서나마 ‘토벌대가 와요. 피하세요.’ 외치고 도망치는 용기를 쥐어짜냈을까. 자신이 가리킨 손가락으로 이웃과 친지들이 죽은 뒤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가 ‘이제라도 말한다’며 학살터 발굴을 돕고 증언하는, 마지막 양심을 보일까. 나는 어느 즈음에 머물까.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니까. 내가 서는 곳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걷는 걸음이 내 인생의 길.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되 비단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구조 자체를 바꾸기 위한 길. 저들의 권력욕과 패권다툼에 제주 인구 10분의 1이 학살당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길에 함께 걷고자 한다. ‘아픔은 길이 된다.’ 이번 제주 인권기행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