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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나 기행
신페이 할아버지와 유키에 할머니와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4·3기행을 다녀온 조카손녀의 얘기를 전해 들은 신페이 할아버지와 유키에 할머니는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조카손녀인 하루나씨와 함께 제주다크투어를 찾았습니다. 1940년생인 신페이 할아버지는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입니다. 다음은 1일 기행을 모두 마친 후 손녀인 하루나씨와 나눈 대화를 재구성했습니다.

역시, 신페이 할아버지 감상을 묻는 첫 질문부터 거침없습니다.

“책에서도 자세히 읽은 내용이라…설명이 조금 간단했다고나 할까”

사실 할아버지는 제주에 오시기로 결정한 후 제주4·3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제주의 역사, 문화, 언어 등 5권의 책을 사서 예습까지 마치고 온 터였습니다.

“근데 모형이라고 해야 하나, 감옥을 재현한 곳이라든지 (다랑쉬)굴 발굴 당시를 재현한 모습은 정말 리얼했어. 정말 이렇게 불쌍하게 돌아가셨구나. 4·3 희생자는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정말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어서 믿기지 않더라구”

할아버지는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평화가 온 것이라 여겼는데 통일국가를 둘러싸고 국민들간에 이런 사건이 발생한 건 정말 불행안 일이야. 그리고 정말 누군가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없었을까 싶고…아무리 미소의 대리전쟁이라는 측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휘말려…, 인도적 차원에서 누군가는 막았어야지. 이건 남과 북을 포함해 거기에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북촌 4.3길
신페이 할아버지와 유키에 할머니가 북촌리 서우봉 일제 진지동굴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를 계산해보면 한반도 독립의 시간은 겨우 3주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잖아요, 기억해요, 할아버지?’ 손녀가 재빠르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손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를 듣게 됩니다.

“일본에도 메이지시대에 가혹한 사건으로 치치부봉기가 있었어. 여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손자세대까지 고통을 받았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해서는 그대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다고 학살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어. 당시 순경 2명만 죽고 대포 맞은 사람이 2~3명 정도. 신슈(나가노현)까지 도망간 사람도 있지만 더 이상의 확산 없이 그걸로 자연해체 되었어. 부채로 신음하던 농민들이 치치부곤민당(困民党)을 조직했지. 봉기라고 해서 무조건 집을 불태우거나 하지 않았고 소나 사람은 죽일 의미가 없다며 미리 도망가라고 했고 사람 목숨을 뺏는 일은 없었지. 물론 여전히 이 일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역사책에도 없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던, 처음 듣는 얘기에 손녀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다시 48년 그때로 얘기를 돌려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미군정시기에 일본군에 협력했던 친일파가 이제는 친미파가 되어 권력을 잡잖아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국 어느 쪽이건 <인권>이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갈림길이지. 요즘처럼 법적인 권리, 의무에 대한 권리라는 차원의 ‘인권’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권’이라는 사상이 존재했다고 생각해. 어느 날 공자의 제자가 스승에게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물었더니 스승은 “충서(忠恕)”라고 대답해. 바로 온화함과 배려(공감)라는 의미이지. 지금 말하는 인권이 바로 이러한 개념이 아닐까. 5살 아이를 죽이거나 6살 아이를 죽이거나 하는 것은 역시 해서는 안되며 그런 행동을 본 상관은 ‘당장 그만해!’하고 말렸어야지. 그런 판단을 했는지 아닌지가 바로 그 갈림길이라고 보는 거지. 내가 당하면 복수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어린 아이들마저도 희생자로 만드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 톤 높여 손녀가 다시 질문합니다.

목시물굴
신페이 할아버지가 4·3당시 주민들이 숨어있었던 목시물굴 입구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는 할아버지.

“그건 실패야…흙 묻은 발로 옆나라에 들어가서는 안돼. 한반도를 지킨다는 이유를 내세워 청일전쟁을 시작했지만 결국 일본을 지키려고 한반도를 방어벽으로 삼은 것에 불과해. 전쟁은 승리로 끝나고, 이후 ‘(조선을)내놔, 내놔’ 하면서 1910년 잘 아는 것처럼 한일병합하고 식민지지배를 한거지. 1945년까지 35년 동안 많은 고통을 받게 했지. 그 후 러일전쟁이 1905년 발발했지. 당시 러시아는 내분상태였어. 러시아혁명 1905년이거든. 러일전쟁 시기와 거의 겹쳐. 러시아제정이 약해졌을 때를 노려 일본이 공격했지. 러시아 내부에 아무일이 없었다면 러시아를 상대로 이길 수 없었을거야. 당시 그러한 공작뒤에는 엄청난 돈을 써가며 스파이작전을 반복하는 일본의 외교가 있었지.

역사와 국어선생님으로 살아오신 연륜을 유감없이 발휘하시네요.

손녀가 다시 할아버지를 기행의 기억 속으로 끌어옵니다.

‘할아버지, 마지막에 일본군 진지동굴 갔었잖아요, 어땠어요?’

“사실 이런 동굴과 똑같은 것을 여기저기에서 많이 봤어.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바보같은 짓이지. 물론 당시 사람들을 진지했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전쟁수행이 가능했겠어? 인간어뢰도 마찬가지야. 상대방에 대한 온화함(仁)과 공감(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절대 가라고 하지 못하지. 극단적으로 말해 자식을 거기에 태울 수 있겠어? 부인을 두고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말이야. 더욱이 일본군은 이미 이 전쟁에서 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명령을 내렸단 말이지.”

마지막으로 전쟁을 경험한 할아버지에게 4·3은 어떤 의미였을까. 손녀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쟁세대라고는 하지만 내가 직접 전쟁에 나가 싸운 것은 아니야. 하지만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바로 ‘공습’이지. 우리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전투모를 쓰고 확성기로 “공습경보발령, 공습경보발령”이라고 소리치면 잠시 후에 정찰기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다다다다다’소리가 나지. 사람이 있든 말든 무차별 공격을 개시하는데 대체로 점심때야. 그러고나면 조금 이따가 다시 그 아저씨 소리가 들려. “공습경보해제, 공습경보해제”. 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고 여기저기 다친 사람들이 출혈이 심한 상태로 리어카 등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지. 1945년 8월 14일, 패전 전날에도 우리 동네 구마가이시(사이타마현 소재)에는 엄청난 공습이 있었어. 시내 전체가 빨갛게 화염으로 뒤덮였지.”

평화공원
지난해 제주다크투어 평화기행에 참여했던 손녀 하루나 님이 할아버지께 '민주주의민족전선 건국5칙'을 설명해주고 있네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숨을 다시 고릅니다.

“사람과 사람의 전쟁은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도 계속 있었지…낡은 생각이라 하겠지만 결국 이 싸움을 멈추려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도 원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면 다른 사람도 싫어할 것이라는 마음밖에는 없지”

일본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소식을 손녀가 전해왔습니다. 한번 더 제주에 와보고 싶다고요. 제주다크투어도 다시 한번 신페이 할아버지와 유키에 할머니를 뵐 날을 기다립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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