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각도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건 역사를 제대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의도와 우연을 지닌 채 움직인다. 김시종의 이야기는 내게 4·3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 또 다른 얼굴이었다.
노래
1929년생 김시종은 ‘황국소년’이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조선의 학생들은 공공장소에서 조선어를 금지당했다. ‘국어’(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호된 매질이 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어 수업은 학생들에게서 관심이 시들했다. 훌륭한 일본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시종은 한글로 가나다라의 가 하나를 쓰지 못하지만, 일본어는 자진해서 열성으로 배웠다. 김시종은 열일곱에 해방을 맞기 전까지 누가 뭐래도 열렬한, 성실한 황국소년이었다. 마음에 힘을 주는 좋은 노래도 일본의 동요와 서정가였다. 그런 김시종이 처음으로 배운 조선어 노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무릎에서 불러준 <클레멘타인>이었다. 광복의 기쁨으로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과 섞이지 못해 외따로 침울해져 있던 김시종은 문득 <클레멘타인>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노래는 김시종을 처음으로 조선에 돌아오게 했다. 김시종은 클레멘타인을 “내 피와 살 속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노래”라고 말한다. 이번 일일기행에서는 <애기 동백꽃의 노래>를 만든 가수 최상돈님과 연주자 김강곤님이 노래와 연주를 하며 함께 걸었다. <클레멘타인>은 기행의 첫 노래였다.
기행이 끝나고도 클레멘타인을 들었다.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최근에 화제가 됐던 재일동포 3세 래퍼의 곡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제주도 출신,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곡은, 제주도 출신 할아버지와 오사카 이쿠노구 출신 아버지를 불러내며 격변의 역사를 살아낸 가족사와 자신의 이야기를 랩에 담았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듯한 나는 도대체 어디 사람 / 일본 사회의 부스럼이지”(래퍼 PM Kenobi의 'Haruboji & Aboji')
김시종을 수식하는 말들을 찾아보니 이런 것들이 있더라. 시인, 작가, 4·3 생존자, 재일조선인, 일본 사회 내 경계인. 경계는 이곳도 저곳도 아니다. 동시에 이곳이기도 저곳이기도 하다. 경계에 선 이들은 가장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저곳의 가장자리가 동시에 이곳의 중심이 된다고도 생각한다. 재일조선인,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4·3을 기억한다는 것, 계승한다는 것은 이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것과 이어지지 않을까.
항쟁
해방 후 김시종은 ‘사회주의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식민지 통치에 맞선 사람들,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 농민운동가나 조합 활동가, 기독교를 비롯한 각 종파의 신앙인들까지. 당시 민중은 뭉뚱그려 사회주의자라 불렀던 것이다. 일제 역시 그들을 빨갱이라 부르며 탄압했다. 열여덟의 김시종은 해방이 됐어도 식민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는 모습을 보며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해 활동한다.
상상해 본다. 관덕정 일대에 ‘인파가 쏟아질 듯이 밀려’오는 그 모습을.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민대회에는 약 3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김시종은 그 풍경에 가슴이 벅차며 “제주도 개벽 이래 최대의 집회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민대회 전에 각 중학교가 연 공동 집회와, 제주도민의 95%가 참여했다는 제주 3.10 총파업의 역사를 비춘다. “이러한 파업 열기는 빨갱이인 남로당의 책동만으로 규합해 낼 수 있는 민심의 결정이 결코 아니었습니다.”고 김시종은 말한다. 4월이 오기 전, 민중들의 분노와 행동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었다.
4·3 발발 직전의 3월 한 달 동안에만 세 명의 젊은이가 잔인한 고문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 토해낼 곳이 없는 도민의 분노가 기화된 가솔린처럼 공중에 가득 차 언제 발화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태로, 제주도의 봄은 진달래가 산을 물들이는 4월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김시종 저, 윤여일 역,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 2016
관덕정을 거닐며 그때의 그 열기를 상상해 보려 노력한다. 이 거리 일대로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생각해 본다. 12.3 계엄 이후 추웠던 겨울의 집회를 참고해 본다. 김시종이 느꼈을 감격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무장대가 묻혀있는 송령이골에서 매년 모이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기행 중에 최상돈 가수는 이런 말을 했다. “4·3에도 정의롭고 건강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궂은 이야기만 남아버렸지만.” 4·3의 정의로움을 기억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남길까. 확실한 건, 그 정의로움에서 빛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다.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이덕구 산전 옆 나무 팻말
피난
1949년 5월, 이번 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가 말한다. “이것은 마지막, 마지막 부탁이다.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말아다오.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 4·3을 겪으며 남조선노동당 연락책으로 활동하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관탈’이라는 무인도로 피신시킨다. 아버지가 건네주신 꾸러미에는 어머니가 챙겨놓은 물건들이 담겨있다. 물이 담긴 굵은 죽통, 콩자반이 든 알루미늄 도시락, 일본 50전 지폐, 고무 물베개, 갈아입을 옷. 어린 시절 허약했던 외동아들을 살리려고 민간신앙에 기대어 저승사자가 찾아와도 마음대로 하라며 버티려고 바위에 아들을 팔았던 어머니, 아들의 숨이 껄떡이던 때 아들을 꼭 껴안아서 숨이 돌아오게 했던 아버지와 기약도 없이 영영 이별하고 있었다. 어선을 타고 바위섬에 들어간 아들은 아버지가 준비해 둔 다음 배를 기다리며 나흘을 ‘게처럼 넙죽 엎드려’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하루, 하루가 어쩌면 그리도 터무니없이 길던지. 밤의 고도에서 얼마나 무자비하게 무섭던지. 65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지독히 날이 길고, 파도 소리는 마구 불안을 헤집고, 갈라진 곳으로 불어치는 바람에 소름 돋아 떨고 있던 자신이, 지금도 누차 같은 악몽 속에서 가위눌립니다.- 김시종 저, 윤여일 역,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 2016
2026년 4월, 일일 기행 마지막 종착지는 관탈섬이 보이는 거리였다.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에 저 멀리 관탈섬이 조그맣게 보인다. 연안 바다는 흙빛이고, 점점 무겁게 푸른색을 띤다. 차갑고 축축한 바위틈에서 엎어져 있었을 스무 살의 청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손끝 발끝이 아프게 시리고, 거친 파도 소리가 순식간에 뇌 속까지 들이쳐서 배고픔과 두려움이 잠시 멎었을 그 장면이. 그 필사적인 밀항이 자꾸 지금의 풍경들과 겹쳤다. 학살을 피해 공포를 억누르며 엎드려 있을,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배를 타고 집채만 한 파도를 건너고 있을 난민들이 떠올랐다. 제주로 나를 이끈 힘에는 4·3을 이해하고자 했던 마음이 있고, 종종 일일 기행에 참여하고 있다. 4·3을 이해하고자 하는 내 마음은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