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 송희영 님이 나눠주신 후기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홈페이지(http://academy.peoplepower21.org/)와, 오마이뉴스(https://bit.ly/2KCdkGF)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X참여연대 '제주4·3 바람이 분다' 평화기행
이경희님 : 그 어두운 동굴 속… 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송희영님 : 기억은 기억이 깃들 장소를 필요로 한다
한 장소에 깃든 역사적 흔적을 보고 느끼고 그 의미를 새기는 데 있어서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지난 4월, 참여연대부설 아카데미느티나무와 제주다크투어가 공동 주최한 "제주4·3 70주년 역사기행– 제주4·3 바람이 분다." 행사가 열렸다. 이번 역사기행은 파편적 지식만을 갖고 있던 참여자 모두에게 제주4·3은 무엇이며,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제주4·3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제주4·3 역사기행을 '역사적 장소체험'으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이번 역사기행은 '제주다크투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다크투어란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줄임말로서 '어둡다', 또는 '암울하다'라는 뜻의 'Dark'가 암시하듯 휴가나 향락을 추구하는 통상적인 여행과 대치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다크투어리즘은 재난, 전쟁, 폭력 등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희생당한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을 찾아 그들을 추모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박물관, 캄보디아 킬링필드 희생자 추모관,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건립된 뉴욕 맨하튼 9.11 메모리얼 등을 들 수 있다.
슬프고 엄숙한 장소에 관광이라는 단어를 접목하는 것에 심리적 불편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세상에 처음 소개된 다크투어리즘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학술적 목적의 답사를 포함한 일반인 대상 문화관광상품으로 정착되고 있으며 더러는 도시마케팅 전략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2018 제주4.3 역사기행은 사실상 한국형 다크투어리즘의 본격적인 시험대와 다름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제주 4.3 7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제주의 다크투어가 거둔 성과와 의미는 무엇인가?
제주다크투어 "제주 4.3 바람이 분다" 프로그램은 크게 특강과 현장답사 두 분야로 나뉘어 진행됐다. 특강은 답사 2주차 전 매주 월요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참여연대에서 있었다. 제주4.3 전문위원을 역임한 김종민 선생과 국제법 전문가 이재승 선생이 강사로 초빙되어 각각 '제주 4.3, 그 진실 찾기의 여정'과 '국제법으로 본 제주 4.3'을 주제로 다루었다. 두 분의 열띤 강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발생한 제주4.3 사건의 최초 발단 배경에서부터 좌익세력 토벌을 빌미로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양민들이 무참히 희생된 과정, 그리고 온전한 진상규명을 포함한 제주4.3에 관련된 향후 주요 쟁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필자의 경우 오래전부터 4.3 유적지 방문을 희망하고 있었으나 역사지식은 물론 지리적 정보가 충분치 못해 미처 실행을 못하고 있던 터에 전문단체가 기획한 답사 프로그램을 발견하게 된 설렘과 기대감이 컸고 결과적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제주4.3 유적지 현장답사는 4월 21일과 22일, 1박 2일 일정에 총 일곱 군데를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첫날 일정은 오전 10시, 참가자들과의 첫 만남 장소인 제주공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20여 명의 참가자 전원이 정시에 출석하여 제주4.3을 알고 배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기가 한눈에 느껴졌다. 서로들 처음 만난 처지라서 다소 어색한 기운이 있었으나 역사기행 현수막을 앞세운 단체 사진 촬영과 함께 자연스레 훈훈한 발대식 분위기로 전도되었다.
첫 방문지 제주4.3평화공원에서 기념관, 봉안관, 행방불명자 묘역 등 모든 전시자료와 시설, 기념물 등을 빼놓지 않고 세밀하게 살펴보느라 오전 시간을 다 보낸 답사팀은 오후 일정으로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과 북촌 4.3길을 탐방했다. 둘째 날엔 동광리 큰넓궤와 일제 강점기 격납고로 사용되던 모슬포 인근의 알뜨르비행장과 섯알오름 학살터, 백조일손지묘를 찾았다. 전 일정 모두 제주출신의 역사전문가가 동행하여 상세한 해설을 들려준 덕분에 매우 알차고 풍요로운 현장체험이 되었다.
첫날 해설은 언론인 출신으로 제주4.3의 진상 조사 및 연구, 그리고 공론화에 헌신해 온 김종민 선생이 맡았다. 서울에서 특강을 통해 참여자들과 구면인 만큼 제주에서 재회하는 반가움이 있었다. 둘째 날엔 '4.3특성화 장학사'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로 스스로 공교육 분야에서의 제주4.3 전도사를 자처한 제주도교육청 소속 한상희 장학사가 맛깔스런 제주방언과 함께 본인의 가족사에 기반한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답사장소에서 얻은 배움과 교훈 뿐 아니라, 이 분들처럼 자발적으로 나서서 제주4.3 알리기에 끊임없이 노력해온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도 이번 답사의 큰 수확이랄 수 있겠다.
지면이 짧은 관계로 방문 장소마다 보고 느낀 소회를 다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나 가장 큰 충격과 깊은 인상을 남긴 동광리 큰넓궤 답사 체험과 섯알오름 학살터 순례길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큰넓궤는 제주4.3을 일반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리는 단초를 제공한 영화 <지슬> 촬영지라는 이유만으로도 호기심과 기대가 컸던 만큼 방문체험도 드라마틱했다.
대로변에 관광버스를 세워두고 큰넓궤 입구를 찾아 외딴 오솔길에 들어서자 흐린 하늘 아래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는 새들마저 나지막한 소리로 숨죽여 지저귀는 적막감이 엄습했다. 무성한 잡풀에 온몸을 휘감은 노목들이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순례길은 마치 70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토벌대를 피해 황급히 집을 떠난 사람들의 피난 행렬을 마주한 착각이 들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해준 헬맷과 장갑을 착용하고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 입구를 통과하자 1미터 남짓의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암흑 속에서 몸을 바닥에 납작 붙이고 개미처럼 7~8m를 기어가는 포복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바닥은 온통 우툴두툴 돌무더기, 뾰족한 용암이 달려있는 천장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심지어 동굴 안쪽에선 박쥐가 푸드덕 댔다. 무릎과 손바닥에 생긴 상처를 감싸며 숨 막힐 정도의 극심한 불안에 떨고 있을 무렵, 갑자기 평평한 너럭바위가 펼쳐지고 평신을 해도 좋을 만큼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긴장과 공포가 일시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이토록 암담한 환경에서 안덕면 동광리 3개 마을 주민 120여 명이 1948년 11월부터 약 40일간 공동생활을 했다. 젖먹이 아이부터 70대 노인에 이른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기적과 같이 40일간의 피난생활을 버텨냈으나 토벌대에 발각된 뒤 눈 내린 한라산 중턱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들 피난민 대다수는 집단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때마침 만개한 노란 유채꽃이 수놓아진 넓은 농지와 모슬포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경 한가운데 있었다. 이른 새벽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던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행적을 알리는 표시로 길가에 벗어 던졌다는 검은 고무신들만이 망자의 유혼처럼 남겨진 잔혹한 학살현장과 마주한 순례자들의 충격과 혼란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다.
유채꽃과 푸른 바다, 춘설을 머금은 동백꽃, 과실향기 그윽한 귤밭,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라산의 사계로 각인되어 있는 한반도 최고의 휴양지 제주도가 사실은 어느 한군데 억울한 죽음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으며, 섬 전체가 아직 채 아물지 않은 비극적인 대학살의 상처로 얼룩진 추모의 장소임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국가권력에 의해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제주 땅에서 벌어졌다고 해서 제주도 사람들만이 겪은 국소적인 일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온 우리의 현대사는 분명히 비극적이다.
장소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위대하다
"장소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위대하다." 고대 로마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키케로의 말이다. 장소는 과거와 현재,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대화를 중재한다. 기억은 기억이 깃들 장소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기억이 깃든 장소를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기억해야 할 기억"이 전승된다. 이제 우리는 제주4.3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의 장소가 갖고 있는 가치와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응답해야 할 때다.
이번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시행된 다크투어는 제주도가 단지 휴양관광도시로서 뿐 아니라, 역사적 장소체험의 가치를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제주4.3 기억의 역사화 작업에 제주다크투어가 더욱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