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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화),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고 강문후, 고 이한성 님의 4·3희생자 신원확인 보고회가 열렸다. 2007년, 2009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유해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유해를 최근 진행된 유족들의 채혈로 신원이 확인되어 보고회가 진행될 수 있었다.

유전자 감식을 주도한 서울대학교 법의학연구소 이순덕 교수는 이번 신원확인은 새로운 유가족의 참여로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제야 신원확인이 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도 했다. 그는 더 많은 4·3유족들이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채혈)를 당부했다.

2023년 4·3희생자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2위이다.

제주4·3평화재단에 따르면, 희생자 고 강문후(1909년생, 남)는 안덕면 동광리 출신으로 1948년 가을 소개령으로 인해 가족들과 안덕면 화순리로 이주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치안질서를 명목으로 시행된 예비검속에 따라 1950년 7월 경 이유도 모른채 끌려가 모슬포경찰서 안덕지서로 끌려간 후에 소식이 끊겼다. 망인의 유해는 2007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의 서북편에서 발견되었기에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3으로 인해 모친과 형수가 희생되었고, 큰 딸도 행방불명되었다.

이번 보고회에는 망인의 아들인 강기순님이 유족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3살 때 아버지가 끌려갔다며 살면서 왜 자신은 아버지가 없는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는 일찍부터 채혈에 참여했으나 유해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최근에 다시 채혈에 참여했고, 9명의 일가친척들이 더 채혈에 참여하면서 망인의 유해의 신원이 확인될 수 있었다.

두번째 유해는 고 이한성(1923년생, 남)으로 제주읍 화북리에 살았는데, 4·3당시 군경토벌대의 폭압으로 피신생활 중 1949년 6월 경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군경의 유인물을 보고 화북국민학교에 주둔했던 경찰에 자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1949년 6월 28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희생자를 비롯해 수십 명이 트럭에 실려 제주공항쪽으로 끌려갔다는 주민들의 소식을 끝으로 행방불명되었다. 망인의 유해는 2009년에 제주공항 남북활주로의 동북편에서 발견되었기에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고, 형 이한빈 역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 되었다.

70년이 지난 2023년 9월 26일 제39차 군법회의 직권재심에서 망인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의 동생 이한진은 제미제주도민회 회장으로 제주4·3의 참혹한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그는 형에 대해 "연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아 날려줬다. 해방이 되자 1946년 형이 만주에서 돌아오면서 내 옷을 사다줬는 데, 옷이 마음에 안든다고 떼를 쓰던 나를 형이 달래줬었다. 나는 개구장이 막내였는데, 셋형이 많은 사랑을 줬다"라고 기억했다. 또한 형이 왜 잡혀갔는지를 생각해보면 4·3의 발발 시점이었던 1948년 3·1절 기념행사에 필요한 현수막 등을 형이 만들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당시 기억나는 문구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때려부시자, 신탁통치 반대, 양과자를 먹으면 누가... 등' 이라고 했다. 형이 한 일은 이것 뿐이라며, 까만 순경복을 입는 두 사람, 평상복을 입은 10여 명이 몰려와 동네 청년들을 잡아갔고, 마을 해변에서 모두 총살되었다. 그런데 형은 총알이 관통해 살아남았는데, 결국 살아남았다는 것 때문에 누이와 어머니까지 희생되었고, 집도 모두 불탔다고 했다. 그는 "여러분이 역사를 바로잡아준 덕분에 오늘 이렇게 유해를 찾아 축하를 받게 되었다"라며, "이제는 형이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어서 "아직도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한 영령과 유족의 슬픔이 크다"라며, "가족이 만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라고 바랐다. "비록 미국에 살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라는 다짐을 하며 인사말을 마쳤다.

70여 년만에 유해를 찾은 것이 너무 다행이면서도, 망인과 같이 살았던 가까운 가족이 거의 남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 흘러서야 유해를 발견하고 그 신위를 모신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동시에 드는 시간이었다.

아직도 270여 구의 유해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고, 유해마저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 희생자가 4천 여명에 이른다. 지난 2년 간 행방불명 수형인의 재심재판을 방청하면서도 느낀 바지만, 행방불명 희생자 유족들이 재심으로 무죄선고를 받는 과정에서 밝힌 가장 큰 소망은 희생자의 유해를 찾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4·3희생자의 유해발굴과 신원확인의 과정은 더디 흘러가는 것만 같다. 2위의 유해에 40명이 넘는 유족들이 모여 그간의 아픔을 위로하고, 유해를 찾은 기쁨을 나눴다. 그러니 이미 발굴된 2백여 구의 유해와 아직 찾지 못한 4천여 명 희생자가 신원을 확인하고, 유해를 찾는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아픔이 큰 위로를 받겠는가.
지체없이 4.3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과 유족 채혈, 신원확인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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