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말> (사)제주다크투어에서는 4·3유적지를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시민지킴이단을 결성하여 제주4·3 유적지 일부를 선정하였습니다. 또한 사전답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시민이 직접 만든 안내판을 만들고, 웹게시판 및 QR코드 리본을 제작하여 활동한 내용을 알리고자 합니다. 시민지킴이단 2기 활동에 참여한 김윤슬·신호선 부부의 후기를 소개합니다.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 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1, 1997, 572-573쪽고 양은하 어머니 윤희춘님의 인터뷰 중에서
죄인은 있지만 죄가 없는,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이 모순적인 사건이 바로 제주 4·3이다. 소위 육지 것이라 불리는 사람이 뭘 안다고 4·3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육지 것이기에 제주의 상처에 대해 더 강하게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스치듯 배웠고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통해 더 크게 인식하게 된 제주 4·3을 더 깊이 있게 알고자 남편과 함께 '제주4·3 유적지 시민지킴이단 ' 2기 활동에 하게 되었다.
첫 방문 유적지는 대정초등학교로 이 곳은 제주4·3 사건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진행된 곳이다. 제주시까지 가기 어려웠던 대정면민 6,000여 명이 모여 이곳 대정국민학교에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일부 청년층의 주도로 시위가 이어져 지역 인사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일부 청년층 남로당이었다는 이유로 대정 지역 주민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감시는 고문치사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낳게 된다.
무고했던 20대 청년 양은하는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한 2·7 투쟁으로 전도적인 검거 선풍이 끌던 2월 9일 무릉지서로 끌려갔다. 마을의 리더급 청년이었다는 이유였다. 그 후1948년 2월 20일 모슬포지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3월 14일 아내와 세 살 난 아들, 어머니가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에 실성하다시피 한 양은하의 처 문옥련은 “내 남편을 살려달라.”고 항의했지만, 그녀 또한 그해 10월 제주지역 토벌 사령관 9연대장 송요찬이 내린 포고령과 11월 내려진 계엄령 때문에 11월 28일 군경에 의해 총살당하게 된다.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국가는 국민을 버렸다. 내 땅을 지키고 내 아이에게 온전한 나라를 물려주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오명을 씌웠고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는, 국가 의견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죽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예비검속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살인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모슬포 부대장이었던 김윤근은 토벌대에게 지시, 마을 주민들이 사상 불순분자로 몰아 대정국민학교(대정초등학교)와 근처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한 후 섯알오름에서 학살하였다.
국가가 민중을 학살한 역사의 시작을 4·3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다.
20대 꽃다운 청년과 그의 아내는 무슨 죄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가?
곧 집에 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슬포 고구마 절간에 구금되었던 양은하의 사촌을 포함한 150여 명의 사람의 죄가 무엇이기에 섯알오름에서 학살되어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죄가 있다면, 양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많은 사람을 고문한 모슬포지서를 왜 모슬포 수협 주차장으로 만들어 이들의 죽음을 지우려 하는가.
이 질문에 그 누구도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남은 우리가 이들에게 죄가 없음을, 죄를 짓고 사죄해야 할 사람들이 제주를 붉은 섬으로 만들어 자신의 배를 채우려 했던 국가와 권력임을 알고 있다.
4·3의 가해자는 미국과 국가, 그리고 권력이다. 해결하지 못한 친일파와 친일 경찰이었다. 친일 경찰에게 고문 기술을 익혔던 경찰들이 민중을 고문했고,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망각한 국가가 국민은 죽인 것이다. 미군정과 국가 권력의 기록, 생존자의 기록 등도 4·3의 가해자를 국가와 권력, 군인, 경찰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무고한 사람들의 총살을 지시했던 실질적 현장 책임자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무관 또한 죽는 날까지 “전연 몰랐다”고 사건을 부정하였고 당시 해병대 사령관도 “군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참말로 유감이다”라는 말로 사건의 책임을 회피한 채 한 줌의 흙이 되어 현충원에서 잠들어 있다.
죄가 없던 죄인들은 70년을 숨죽여 살았다. 자신의 억울함조차 토로하지 못했다. 연좌제라는 이유로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또 다시 죄인이 될까 봐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어떠한가. 4·3의 공을 세워 부마 민중항쟁에서 민중을 억압했고 5·18 광주 민중항쟁에서 민중을 짓밟았다.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쓰러트렸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감이다”라는 말로 역사를 지우려 한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에 살아갈 후손들과 먼저 간 사람들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민중 학살의 역사를 사죄하길 바란다.
일제 강점기를 부정하는 일본과 같은 부정적 모습으로 평가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떠나간 둘째 아들과 며느리. 큰아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며 억울함을 토로한 윤희춘 어르신, 하늘에선 그리워하던 둘째 아들 양은하님을 만나셨나요? 그곳에선 먼저 간 두 아드님과 며느님의 손 꼭 잡고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아드님들 죄인 만든 나쁜 사람들은 이 땅에 살고있는 저희가 두고두고 기억해서 꼭 사죄하게 할게요.
이유도 모른 채 피 흘리며 스러져간 4.3의 모든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