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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7월 17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이수정 홍보기획팀장

Q. 오늘 소개해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 소개해 드릴 유적지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굴입니다. 제주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가 40여 년이 지난 1992년에 희생자들의 유해가 무더기로 발견되어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줬던 곳입니다.

Q. 다랑쉬굴은 제주4·3에 관해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유적지인데요. 4·3 당시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죠?

A. 토벌대의 학살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1948년 12월 18일, 생존을 위해 다랑쉬굴로 피신했던 주민 13명이 제9연대 2대대 군인과 이들을 지원하는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었습니다. 여러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주민들이 피신한 굴을 발견한 토벌대는 처음에 수류탄을 던져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나오도록 강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에 불을 지피고 구멍을 막아 사람들을 질식시켜 살해했습니다.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현장 모습.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현장 모습.

Q. 나중에 발견되었을 당시 굴 내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A. 다랑쉬굴은 길이 30m 정도의 규모가 작은 용암동굴입니다. 굴 입구는 직경 60cm 정도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굴은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사람의 신장(콩팥)과 비슷한 구조로 좌우 대칭적인 구조입니다. 시신 10구는 굴의 오른쪽 동공(洞空)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시신들은 몸을 맞댄 채 비교적 가지런히 누워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구의 시신은 왼쪽 동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굴속에는 솥과 놋그릇과 숫가락, 항아리, 양푼, 가죽신, 비녀, 혁대, 안경 등 희생자들이 생활할 때 사용했던 유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Q. 희생자들이 숨을 쉬지 못해 돌아가셨으면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A. 네, 당시 다랑쉬굴에서 이틀 정도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참사를 모면한 생존자가 다랑쉬굴이 발견됐던 1992년 당시에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생존자는 참사 이튿날 다랑쉬굴을 찾아 시신들을 나란히 눕히는 등 정리를 했다고 합니다. 해당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참사 이튿날에 굴속에 들어가니 굴속은 여전히 연기가 가득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굴속에는 고통을 참지 못해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은 시신들이 있었고, 시신들의 코와 귀에서 피가 나 있었다고 했습니다.

Q. 희생자들의 신원은 밝혀졌나요?

A. 네, 다행히 당시를 기억하는 생존자들이 있어서 신원이 밝혀졌는데요. 애초 이 다랑쉬굴에서 13명이 희생되었는데 희생 직후 2명은 따로 수습되었고, 나머지 11명은 수십 년간 굴속에서 방치된 후에야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발견된 피해자들은 구좌읍 종달리 주민 7명과 하도리 주민 4명 등 총 11명이었습니다. 특히, 희생자 중에는 9살 남자아이와 여성 3명이 있어서 당시 4·3희생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제주도민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Q. 희생자들은 어떤 이유로 다랑쉬굴로 피신했던 건가요?

A. 이 부분도 앞서 시신들을 정리했던 생존자가 인터뷰했던 내용이 남아있는데요. 희생자의 과반이 종달리 주민인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종달리는 1947년 벌어진 소위 ‘6·6사건’의 여파가 있어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던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4·3이 발발하면서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자 일부 청년들이 산으로 피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굴로 피신한 것은 이러한 마을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Q. 말씀 중에 ‘6·6사건’이라는 사건을 언급하셨는데,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어요?

A. 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종달리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1947년 6월 6일 종달리 조선민주청년총동맹(민청)의 집회를 단속하던 경찰 3명이 오히려 집회에 참석한 청년들에게 폭행당해 다친 사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 8시쯤 당시 구좌면 종달리 해안가에서는 마을 청년 200명 정도가 모인 가운데 마을 민청 집회가 열렸습니다. 경찰은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청년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집단으로 구타를 당한 것입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중요하게 보고 관련 수배자가 71명에 이른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날 집회는 불법적인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더욱 수사당국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현장 모습.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현장 모습.

Q. 불법적인 성격이요?

A. 미군정은 앞서 1947년 5월 16일 행정명령으로 민청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중앙 민청에서는 며칠 후인 5월 21일부터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해 6월 5일 합법단체로 조선민주애국청년총동맹(민애청)을 조직해 등록하게 됩니다. 종달리 민청의 이날 집회는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향후 조직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근데 이렇게 주민과 경찰들이 충돌하는 사건이 종달리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Q.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말씀이신가요?

A. 네, ‘종달리사건’처럼 주민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은 관덕정 발포사건이 일어난 1947년 이후 제주도 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앞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종달리보다 앞선 시점인 3월에 우도와 중문에서 경찰과 주민들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8월에는 북촌리에서도 경찰과 주민들이 충돌하게 됩니다. 특히, 중문과 북촌에서는 경찰들이 주민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는 등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3·1절 기념식에서의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이후 주민과 경찰 간의 골이 더 깊어진 것이죠.

Q. ‘6·6사건’에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군요. 다시 다랑쉬굴로 돌아와서 궁금한 점이 있는데 다랑쉬굴은 어떻게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발견된 건가요?

A. 다랑쉬굴은 제주4·3연구소 조사팀이 4·3 당시 없어진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던 중 1992년 3월 22일에 발견됩니다. 이어 3월 29일에는 4·3연구소팀과 제민일보 4·3취재반이 1차 합동조사를 벌입니다. 제주4·3 44주기를 앞둔 4월 1일에는 취재진과 4·3연구소팀 외에도 의사, 제주대 박물관장, 변호사 등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2차 합동조사가 진행됩니다.

Q. 2차 합동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현장을 둘러보고 어떤 말을 했나요?

A. 이 합동조사에는 이청규 제주대 박물관장, 최병모 변호사, 전신권 성형외과 전문의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청규 박물관장은 당시 <제민일보 4·3취재반>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말로만 듣던 4·3의 수난현장이 이렇게 생생하게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골동품의 역사가 아닌, 살아 있는 생생한 역사로서 차후 세대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도 이곳의 유물에 대한 보존이나 현장의 재연사업 등이 모색돼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최병모 변호사는 “그들이 어떤 입장에 있든 저렇게 죽어서 시신들이 내버려져서는 안 된다”라며, “이 문제는 법률적 문제 이전의 정치적 문제로 치유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신권 전문의는 “여러 정황으로 미뤄 4·3 때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치아와 두개골 모양 등으로 볼 때 할머니를 비롯해 10대 후반과 20대 중반 등의 여자 2~3명을 포함,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가 일시에 숨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습니다.

Q. 이 현장을 처음 발견한 제주4·3연구소에서는요?

A. 고창훈 제주4·3연구소장은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했습니다. 고창훈 연구소장은 “4·3의 문제가 그동안 말로 글로 표현되어 왔지만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4·3의 모든 것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랑쉬굴을 한마디로 4·3의 총체적 현장이나 다름없다”라며,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는 가진 넋들을 옳게 진혼하고 최소한 유골들을 깜깜한 동굴 속에서 해방 시켜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고 연구소장의 발언은 공허한 울림이 되어 버립니다.

Q.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A. 유해가 세상에 드러난 지 45일만인 5월 15일 시신들은 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화장되어 종달리 앞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싶다 등 애초 희생자들의 유해가 막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유족들의 반응과는 거리가 있는 처사였습니다. 후에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렇게 시신들이 화장된 뒷배경에는 행정과 정보기관의 입김이 닿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의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조치였던 것입니다. 화장이 이뤄진 후 한 유족은 언론을 통해 ‘화장이 불가피하다면 뼛가루라도 좀 달라며 심한 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분위기에 승복했다’라며 당시 유족들이 겪었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매장을 권유함에 불구하고 유족들이 한사코 화장을 주장했다”는 당시 행정당국의 발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발언이었습니다. 이렇듯 다랑쉬굴 희생자는 죽은 후에도 국가에 의해 흩어져 은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 투쟁을 통해 독재정권이 물러났지만, 사정당국의 힘이 여전히 강력하게 기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Q. 그런데 토벌대는 왜 이토록 참혹하고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학살했던 것일까요?

A. 당시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무장대에 협력하는 세력이라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적으로 규정해 작전을 펼쳤습니다.

Q. 단지 무장대에 협력했을 것이라는 ‘가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A. 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4·3 당시 미군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49년 4월 1일자 <G-2 정기보고서>에 따르면 “9연대는 모든 저항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의 9연대의 점령기간에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자행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현장 모습. 굴 입구가 돌로 막혀있다.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현장 모습. 굴 입구가 돌로 막혀있다.

Q. 단순히 그럴 수 있다는 ‘가정’만으로 주민들을 가상의 적으로 규정해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인 것이군요. 그게 가능한 일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이유가 또 있지 않았나요?

A. 네, 아까 설명해드린 원인은 군 토벌대의 작전상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원적인 이유는 제주에 주둔했던 제9연대가 12월 말 대전에 주둔했던 제2연대 맞교대가 이뤄지는데, 부대 이동 전에 이른바 ‘전과’를 올리기 위해 이처럼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인 게 아닐까 하는 해석입니다.

Q. 전과를 올리기 위해 민간인을 학살했다라…. 이것도 충격적인 얘기인데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A. 지난번에 간략히 설명해 드리긴 했는데, 1946년 8월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도제(道制)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는 각 도별로 1개 연대씩을 창성하도록 하는 미군정의 이른바 ‘대나무 계획(Bamboo plan)’에 따라 같은 해 11월 9연대가 창설됩니다. 1948년 4·3이 발발한 이후 잠깐 11연대로 합편되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9연대로 재편되어 4·3 학살의 주범으로 토벌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학살의 광풍이 가장 극심하게 몰아치던 1948년 12월, 9연대는 대전에 주둔하던 제2연대와 주둔지를 교체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2연대는 제주도민들을 학살할 수 없다며 여순항쟁을 일으킨 제14연대를 진압한 부대입니다. 9연대는 2연대의 전과를 의식해 ‘전과 올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Q. 전과를 올리기 위해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니,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있나요?

A. 우선 미군보고서에 이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948년 12월 17일자 미군의 <G-2 정기보고서>에는 “최근 9연대의 진압작전이 계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라며, “수준 높은 작전을 전개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실제 이 시기에 9연대 전과라고 보고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적과의 교전’으로 적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아군 측 피해는 전무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948년 12월 8일 이범석 당시 총리가 국회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제주도에서 ‘적 유기사체’ 421명에, ‘포로’가 5,719명인데 반해 국군 측의 손해는 전사 3명에 전상 8명이었습니다. 통상 게릴라전에서는 적의 기습 때문에 진압 측의 피해가 큰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앞서 설명한 9연대의 전과가 상적인 방식의 교전을 통해 얻은 전과가 맞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획한 무기 빈약함도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합니다.

심지어 토벌대는 대살(代殺), 자수사건, 함정토벌 등 교묘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전과 올리기’에 열을 올립니다.

Q. 대살(代殺), 자수사건, 함정토벌이요?

A. 대표적인 사례들을 한 가지씩 소개해 드리자면, 우선 ‘대살’은 말 그대로 대신 살해당한다는 뜻인데요. 토벌대는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가족 중 청년이 사라진 가족을 ‘도피자 가족’이라 규정하고 총살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에서 주민 48명이 이 같은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자수사건은 토벌대가 ‘자수하면 살려주겠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자수를 하는 주민들을 총살하는 수법입니다. 토벌대는 주민들의 자수를 끌어내기 위해 ‘이미 관련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협박을 합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거나 1947년 3·1절 발포사건에서 항의했다거나 하는 등 당시 많은 제주도민이 참여했던 활동도 빌미가 되었습니다. 자수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얼마 전에 소개해 드렸던 ‘박성내 사건’이 있습니다.

Q. 함정토벌은 어떤 것인가요?

A. 토벌대가 무장대(인민유격대)의 복장을 하고 민가에 가서 협조를 요청해 이에 응하는 사람들을 총살하는 방식입니다. 함정토벌은 제주도 내 전역에서 벌어졌습니다. 1949년 1월 제주읍 도평리에서 주민 70명가량이 총살당한 사건이 대표적인 함정토벌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월 3일 오전 갈옷을 입고 총을 든 한 무리가 도평리에 들이닥쳤습니다. 이들은 주민들 집안에 침입해 ‘너희들은 왜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며 위협하고,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킵니다. 그러나 주민들 중 일부가 이 무리 중 일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발견해서 함정임을 알아채고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대한민국 만세’, ‘빨갱이면 맞서 싸우겠다’ 등의 말을 했으나 결국 토벌대의 손에 희생되고 맙니다.

근데 한편으론 군 토벌대가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이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Q. 또 다른 이유요?

A. 바로 본인들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본격적인 학살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8년 10월 말 제주 주둔 9연대에서는 군부대 내 첩자를 색출해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숙군작업’이 이뤄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지난 시간에 정리해 드렸는데요. 다시 간략하게 설명해드리자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군인은 호명되어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숙군작업’으로 약 80여 명의 군인이 총살을 당하는데요. 총살 대상의 대다수는 제주도 출신 군인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상부의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전공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안내판 모습.
제주4·3유적지 다랑쉬굴 안내판 모습.

Q. 이야기를 하다 보니 4·3 당시 가장 많은 학살이 이뤄진 초토화작전 당시 군 토벌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네요. 그렇다면 다랑쉬굴은 현재 어떻게 보존되고 있나요?

A. 다랑쉬굴은 현재 큰 바위로 입구가 막혀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굴 내부에는 희생자들이 4·3 당시 피난생활을 하며 사용했던 집기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랑쉬굴 앞에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요. 4·3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내용이 충실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만, 다랑쉬굴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이나 경사면을 거쳐야 하는 만큼 이동약자들을 위해 휠체어 등으로 접근이 가능한 지점에 안내판을 추가로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외국인을 위한 외국어 안내판과 저시력자 등을 위한 점자 안내 혹은 음성변환용 코드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다랑쉬굴 학살 현장은 70여 년 전 학살이 자행된 날부터, 수십 년이 흘러 유해가 발굴돼 희생자들이 졸속으로 화장되어 처리되는 과정까지 4·3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유적지 관리와 안내판 정비가 제대로 이뤄져 보다 많은 사람이 다랑쉬굴에 대해 알 수 있길 바랍니다. 아울러 다랑쉬굴 부지 일대가 서울에 있는 유명 사학 재단의 소유입니다. 행정에서는 중요한 4·3 유적지인 다랑쉬굴 매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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