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4·3유적지 라디오] 4월 첫째 주 _ 4·3이 주는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며
[4·3유적지 라디오] 4월 둘째 주_ 제주의 푸른바다와 마을 돌담이 기억하는 북촌마을 이야기
Q. 방송하는 오늘이 4월 3일입니다. 오전에는 제주4·3 제73주년 추념식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 되었는데 오늘 분위기는 어땠나요?
A. 코로나로 인해 제주4·3 73주년 추념식장에는 65세 이상 유족이 참석할 수 없었고 아주 소수의 인원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고령의 유족분들이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되었고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직접 참석하셔서 많은 도민과 유족들이 함께 축하하는 자리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많이들 섭섭해하셨습니다.
Q. 오늘 소개해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73년 전 오늘 4월 3일에 무장대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를 습격하였는데 이때 습격 대상지였던 곳 중 하나인 삼양지서와 성산지서 그리고 4·3 무장봉기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Q. 제주에서 있었던 7년 7개월의 대사건의 상징이 4·3으로 된 것은 무장봉기가 일어난 날짜인 4월 3일인 거죠?
A. 맞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중심이 되어 1948년 4월 3일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제주도의 24개의 경찰지서 중 12개를 습격했고 경찰과 우익인사 12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권력을 쟁취한 이승만 집권세력은 이후 반세기 동안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탄압을 했습니다. 4월 3일 이전에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Q. 4·3희생자가 3만 명 이상이라고 하는데 이날 희생된 분은 의외로 많지 않네요?
A. 4·3을 처음 접하는 분 중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4월 3일 당일에 있었던 희생자는 14명입니다. 대토벌이 있었던 1948년 겨울과 1949년 봄 사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4월 3일에 추념식을 봉행하는 것은 70여 년 전 제주에 있었던 대규모 사건에 대한 상징이 4·3이라는 단어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 지난 시간에 4·3이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삼는다고 했잖아요? 그 이유가 있는 거죠?
A. 50년 동안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왜곡이 되었고 단지 ‘공산폭동’이라는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탄압을 해왔었는데요. 왜 무장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진상조사를 하면서 그 배경에는 이미 3·1발포사건에서부터 이어져 온 미군정의 실정과 이승만 정권의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가 주장했던 것이 있나요?
A.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은 자신을 인민유격대로 호칭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2가지의 유인물을 살포했는데요.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과 우익단체에 보내는 경고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었습니다.
Q. 경고문과 호소문이요?
A.경고문의 내용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말로 요약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경찰과 우익인사들은 총부리를 당신의 가족들에게 돌리지 말고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탄압하는 매국노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호소문에는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해 궐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장봉기를 일으킨 주장을 이 두 가지 유인물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Q. 저번 시간에 3·1발포사건 이후에 미군정과 경찰 당국이 철저하게 탄압을 했고 그러면서 고문치사사건까지 발생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요. 단선 단정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데 이건 어떤 내용인가요?
A. 4·3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의 한반도 정치상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요. 해방 이후 남과 북을 각각 점령했던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두 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각각의 정부가 들어설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이승만은 UN의 감시하에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투표를 해서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고 1948년 5월 10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위한 단독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UN 감시 아래 가능한 선거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반대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면 북쪽에도 반드시 단독으로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영구히 분단될 것이 분명하므로 단선 단정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Q. 그렇다면, 4·3 이후 5·10선거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A. 예정대로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의 선거구에서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전국 평균 95.5%의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3개의 선거구 중에서 2개의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효화 됩니다. 제주시 갑구는 투표율이 43%, 제주시 을구는 투표율이 46.5%로 과반수가 미달되면서 선거가 무효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과반수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4월 3일에 있었던 무장봉기보다 미군정에 더 큰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장대가 주장했던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때 제주도의 선거가 무산되었던 것이 대토벌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5·10선거 무효화 이후 어떤 상황이 펼쳐졌나요?
A. 미군정은 박진경 연대장을 책임자로 해서 강한 탄압을 진행했고 1948년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고자 했으나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들에 의해 암살이 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제주도는 1년 후인 1949년 5월 10일에야 재선거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Q. 그렇다면 5·10선거 이후 국회가 구성되고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난 뒤 제주도의 정세는 어떠하였나요?
A.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했던 제주도가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 될 수밖에 없었고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는 유엔의 절차가 12월에 예정되어 있어서 미군정과 이승만은 조급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군정은 1948년 말까지 한반도를 떠날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빨리 사태를 정리해야만 했었습니다. 이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완전 섬멸을 선택하게 됩니다.
Q. 1948년 말부터 강렬한 토벌이 시작되었던 것이네요.
A. 1948년 10월 17일부터 강력한 토벌이 시작되게 됩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시키고 이를 어길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하고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무장대와 지리적으로 가까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잡혀가고 총살당하며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잔인무도한 행동에 중산간 주민과 제주민들은 희생되어갔습니다.
특히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는데 이후 무차별 살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Q. 제주4·3으로 3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가운데 이 시기에 가장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던 거군요.
A.그렇습니다. 1948년 말 대토벌이 시작된 후 1949년 초까지 4개월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주민들은 중산간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당했고, 이는 중산간 지역 주민들의 삶을 빼앗고 일단 적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또 해안가 마을이라고 해서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곳으로 북촌마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Q. 1948년 4월 3일 당시 습격받았던 지서에 대해서 설명해주신다고요?
A. 네. 1948년 4월 3일 무장대는 12개 경찰서를 습격하게 되는데요. 12개의 지서 중 ‘삼양지서’에 대해 먼저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Q. 당시 삼양지서에는 어떤 사연이 있나요?
A. 삼양지서는 4월 3일에 무장대 20여 명이 습격을 했는데 별다른 피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양리는 해변마을이면서도 대학살 시기 내내 희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토벌대는 자주 경찰지서 습격을 당하는 삼양리를 늘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1949년 1월 3일은 삼양리 주민들이 무장대와 진압군 양측으로부터 큰 희생을 당한 날입니다.
2연대와 9연대가 교체하는 시기를 틈타 무장대가 삼양지서를 습격하면서 마을에서 보초를 서던 주민 10여 명을 살해하고 민가들을 불태웠습니다.
Q. 무장대의 습격으로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무장대가 물러간 후에 경찰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가만히 있지 않았죠. 무장대가 물러가자 경찰은 보복 총살극을 벌였습니다. 당시 집안에 청년이 사라지면 ‘도피자가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주민들을 총살했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나와 있는 당시 보복총살 희생자의 아들분의 증언에 따르면, 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악이 받쳐 지서를 습격하고 보초 서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산사람들이 지서를 습격하면 다음 날엔 경찰이 산사람 가족이라 하여 주민들을 처형하곤 했다고 합니다.
Q. 무장대의 습격과 토벌대의 보복이라는 참으로 안타까운 악순환의 반복이었네요.
A. 네. 강경진압작전 때 희생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장대가 아니라 마을에 살던 무고한 주민들이었습니다. 멀쩡히 마을에 있는 주민들에게 보복총살을 한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1949년 초에도 무장대의 삼양리 마을 공격은 집요했습니다. 당시 삼양지서에 ‘정용철 주임’은 서북청년단원 출신으로 마을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하루에 한 명 이상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고 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으니 주민들의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Q. 서북청년단 출신이 당시 지서의 주임으로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요?
A. 당시 서북청년단원들은 경찰로 둔갑해 제주에 파견됐으며, 미군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의 결정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을 경찰로 만들었고 지원자를 늘리기 위해서 20명을 모아오면 그중 1명을 경사로, 50명엔 경위 1명, 200명에는 경감 1명을 특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깡패들에게 무리를 이끌고 오면 합법적인 권력을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정 주임은 이런 방침에 따라 경위로 특채된 것입니다. 정 주임은 주민들을 잡아 와 고문한 뒤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 명씩 잡아다 죽이기도 했습니다.
Q.그렇군요. 현재 삼양지서 옛터에는 유적지의 흔적이 남아있나요?
A. 현재 유적지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삼양리는 토벌대의 학살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것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토벌대의 명령에 응했던 민간인들이 무장대에 의해 인명 피해를 입은 곳입니다. ‘낮에는 토벌대에,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렸다.’는 4·3 당시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삼양지서는 정용철 주임이 주민들을 수시로 고문하고 학살했던 곳임에도 이러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없습니다. 안내판 설치 시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와 『4·3은 말한다』 등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삼양지서 및 지서 인근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에 대한 내용을 기술 할 필요가 있고, 이동약자의 접근성을 보장하고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합니다.
Q. 두번 째로 소개해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성산지서’ 입니다.
Q. 성산지서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A. 성산지서 또한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12개 경찰지서 중 한 곳입니다. 당시 성산지서에는 14명의 경찰관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습격 당시에는 3명이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장대 40여명이 습격했지만, 경찰이 대응 사격하자 모두 퇴각하여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성산지서는 3·1사건 이전에 5명의 경찰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3·1사건 직후 육지부 경찰 9명이 추가로 배치되면서 제주 출신보다 외지 경찰이 더 많은 지서였습니다.
Q. 후에 제주도 각 경찰서에는 예비검속으로 수감된 사람들에 대해 총살 명령이 내려왔다고 하죠?
A. 예비검속과 관련해 당시 성산경찰서에 근무 중이던 문형순 서장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해방 이후 경찰이 된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에 부임해 모슬포경찰서장과 성산포경찰서장을 맡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군 당국이 예비검속자에 대해 총살 명령을 내리자 ‘부당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습니다. 부당한 일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조직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 상부의 지시를 어기는 것은 그 당시라면 더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Q. 당시 문형순 서장이 총살 명령을 거부하면서 주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나요?
A. 1950년 8월 문형순 서장 앞으로 하나의 문서가 송달됐습니다. 그 문서는 제주 주둔 해병대 정보 참모인 해군중령 김두찬으로부터 온 문서였습니다. 문서에는 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 해당하는 자에 대해서 총살을 집행한 후 그 결과를 육군 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대장에게 보고하라는 문서였습니다. 문형순 서장이 문서 위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굵은 글씨로 휘갈긴 이 글자 덕분에 많은 제주도민들이 참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Q. 당시 문형순 서장의 용기 있는 선택으로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네요.
A.그렇습니다. 문형순 서장의 기개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문형순 서장은 모슬포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도 100여 명의 주민들의 목숨을 구한 바 있습니다.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당시 대정읍 하모리에는 좌익총책이 붙잡혀 많은 사람들이 처형될 위기에 놓였었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했고 어떤 식으로 조서를 써야 할지 방법을 알려주고 주민들에게 피해 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줬던 것입니다.
Q. 4·3의 비극 속에서 문형순 서장이 보여준 의로움 덕분에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A. 그렇습니다. 1950년 8월~9월경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 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형순 서장의 ‘용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비검속으로 성산포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음을 당했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2018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돼 제주경찰청 앞에 그의 흉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Q. 성산지서 옛터에는 4·3 관련 안내판을 찾아볼 수 있나요?
A. 현재 이 자리에는 성산파출소가 자리 잡고 있고 사설단체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긴 있으나 안내판 내용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4·3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전체적인 설명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무장대에 대해 ‘폭도’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폭도’는 폭동을 일으키거나 폭동에 가담한 사람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공식 채택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제주4·3의 성격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무장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위에서 설명한 문형순 서장이 예비검속이 진행되는 와중에 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민간인 학살을 막은 일은 주목할 사건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은 제주4·3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건이므로 안내판에 기록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시각장애인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 외국인을 위한 외국어 안내판 등이 추가로 설치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