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3월 마지막 시간은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가 4·3과 학교라는 주제를 가지고 ‘제주농업학교 옛터’, ‘조천중학원 옛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은 4·3과 학교라는 주제를 가지고 유적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전농로에 있었던 제주농업학교와 조천지역 인재의 산실이었던 조천중학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Q. 전농로 벚꽃거리에 학교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요.
A. 현재 LH주택공사 일대 터가 예전 제주농업학교 터입니다. '전농(典農)로’라는 명칭은 1977년 이 도로가 개설되면서 당시 이 자리에 있던 제주농업학교가 지금의 한라수목원 옆쪽으로 터(현 제주고등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제주농업학교 70년사를 길이 빛내줄 것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Q. 아, 도로명에 그런 뜻이 담겨 있었군요. 그렇다면 제주농업학교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A. 제주농업학교는 1907년에 ‘사립 의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지금의 오현단 부지에 세워졌다가 1909년 제주공립농림학교 인가를 받고, 1940년 제주공립농업학교 5년제로 승격 후 전농로 일대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해방 전후 시기에 제주지역에서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이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고, 1945년 9월 28일에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제일 처음 찾아간 장소가 바로 제주농업학교인데, 일본군의 항복 절차가 여기에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양과자반대시위와 1947년 3.1 시위, 3·10 총파업에도 이 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주농업학교의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4·3 기간에 고초를 겪게 됩니다.
Q. 해방 전후로 이곳 농업학교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해방 후 시대적 배경과 연관 지어 설명해 주시겠어요?
A. 해방 후 제주도는 그 어느 지역보다 교육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국민학교뿐만 아니라 중등학교 세우기 운동이 활발했고, 학교 세우기 운동은 행정기관이 아닌 주민들의 손에 의하여 설립 추진되었습니다. 학교 운영비는 지역 유지들이 각자 모아서 충당했고, 교사들은 무보수로 근무했다고 했을 정도이니 교육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Q. 당시 제주도는 교육 열기가 뜨거웠고, 교육수준도 굉장히 높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네요?
A. 그렇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타지역에 비해 교육 수준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습니다. 이에 대한 자료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4·3피해자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똑똑하고 지역에서 신망받는 사람들이 4·3시기에 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침묵의 세월이 반세기 동안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Q. 제주농업학교와 관련된 사건은 어떤 것이 있나요?
A. 1947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은 일제 잔재 교육과 파쇼 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해방 후 자주독립과 민주국가 건설에 대한 강한 열망이 강했고 교육 분야에서도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학생들이 일어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농업학교에서 시작된 동맹휴학은 후에 오현중학원 학생들의 참여로 사회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후에는 단순 학생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으로 번져 양과자 반대투쟁, 3.1절 시위에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Q. 당시 양과자 수입 반대 문제는 전국적인 이슈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제주에서 이 시위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거죠?
A. 해방이 된 후에 교단에는 친일 전력이 있는 교사들이 많이 있어서인지 교사들보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당시 학생시위는 제주농업학교, 오현중, 제주중 등이 참여하여 양과자 수입을 절대 반대하고, 모리배를 배격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시위는 1947년 2월 10일 관덕정 앞 광장에서 진행됐었는데, 미군 보고서에는 300~400명, 제주신보는 1천여 명이 동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정 당국은 이를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미 시위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반미 감정을 부추기는 등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Q. 그렇군요. 이외에도 제주농업학교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나요?
A.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9연대, 11연대, 2연대 등의 군사령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해에는 이곳 농업학교에 임시수용소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Q. 4·3 당시 군부대가 주둔했다는 것은 이곳에서 엄청난 광풍이 몰아쳤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A. 실제로 9연대(후에 11연대로 합편 됨)가 주둔하면서 이곳은 토벌의 중심부가 됐고, 임시수용소를 만들어 많은 고문 취조 및 도민들을 구금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곳에서는 4·28평화회담 결렬 이후 김익렬연대장 후임으로 내려온 제11연대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Q. 그렇군요. 또 농업학교는 4·3 당시 9연대의 임시수용소가 설치되기도 했다고요?
A. 그렇습니다. 1948년 가을부터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제주농업학교 임시수용소는 제주읍내 유지들로 가득 찼습니다. 제주읍내 유지들 가운데 농업학교 임시수용소에 안 갔다 온 사람을 꼽기가 어려울 정도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 이때 끌려온 사람들은 교육계, 공무원, 주요단체장, 법조계 판검사 등 지역에서 신망받는 유지들이었습니다. 당시 임시수용소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임시수용소에 구금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Q. 농업학교는 유일한 근대 교육기관이기도 했지만, 4·3 당시에는 많은 주민들이 두려움과 고통이 깃든 곳이기도 하겠군요. 그렇다면 현재 농업학교 터에는 4·3 당시를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나요?
A. 유적지 안내판 조사 결과, 4·3 당시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고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농업학교가 이전되게 된 경위 등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농업학교 옛터는 일제 패망부터 제주4·3까지 많은 이야기가 중첩된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일제강점기~제주4·3 당시 제주농업학교의 역사와 역사적 사건들이 종합적으로 기술된 안내판 설치가 필요합니다.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사진과 같은 시각자료를 활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설치 시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 변환용 코드나 점자 안내판 설치를 해야 하고요. 외국어 안내판 설치도 해야 할 것입니다.
Q. 두 번째로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조천중학원입니다. 앞전에 말씀드렸듯이, 해방 후 교육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그 열기는 국민학교와 더불어 중등학교 설립 붐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천중학원 역시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1946년 설립됩니다.
Q. 조천중학원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나요?
A. 3·1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이후에 미군정과 경찰은 사건에 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보다는 탄압을 우선으로 했다고 저번 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요. 1947년이 지나가고 1948년에 이르면서 경찰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4·3 발발 직전에 ‘고문치사’라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게 됩니다.
Q. 고문을 받다가 사람들이 죽었나요?
A. 조천중학원은 1947년 3.1절 시위 및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청의 탄압을 받아 사실상 수업이 어려웠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1948년 3월에 접어들면서 제주에서는 무려 3건의 고문치사가 발생하게 됩니다.
3월 6일 조천중학원 2학년생이던 김용철이 조천지서에 연행된 지 이틀 만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이 사건이 발생한 뒤로도 영락리 출신 청년 1명이 경찰의 구타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금릉리 출신 마을 청년 한 명도 서북청년단에 의해 구타를 당한 뒤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경찰은 여전히 진실을 감추기 급급했습니다.
Q. 고문치사사건은 엄연하게 존재했다는 사건이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A. 그렇습니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은 조사과정에서 당시 경찰에서 이들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조직적인 시도가 있었고, 모슬포에서는 시신을 유족 몰래 암매장하려 했던 사실들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조천지역에서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청년이 숨진 사실을 알게 되자 민심이 들끓었고, 특히 조천중학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조천면장이었던 분의 증언 내용에는 조천지서 경찰관 중 2명은 이북 출신이었고 육지경찰들이 들어오면서 취조가 더욱 심해진 건 사실이라며, 당시 사망자의 부검 결과 고문치사로 판명됐고, 제주에서는 최초의 고문치사사건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Q. 당시 경찰은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거네요?
A. 그렇습니다. 경찰 측에서는 김용철 학생이 고문에 의한 사망이 아닌, 지병 때문에 사망했다고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시신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신 부검을 위해 이북 출신 검시 의사를 적극 추천했고, 검찰은 제주 출신 의사를 선택했습니다. 4·3이전에는 그래도 검찰권이 살아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례적으로 두 차례 부검이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Q. 당시 부검 결과 고문치사로 판명이 난건가요?
A. 1차 부검 당시 경찰의 훼방으로 진행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미군정 측에서 재부검을 지시했고, 2차 부검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사인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당시 2차 부검을 진행했던 의사 장시영은 경찰들의 회유와 협박에도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로 의사의 선택은 쉽지 않았지만 대단히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Q. 고문치사로 판명 난 뒤 조천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을 것 같네요.
A. 그렇습니다. 당시 김용철 학생이 고문에 의해 숨진 사실이 며칠 후에야 밝혀지면서 조천중학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 바로 앞에 있었던 조천지서 앞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에 경찰은 주동한 학생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두려움과 공포감에 산에 오르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문치사사건이 있기 전에 조천중학원 교사로 있던 이덕구 등의 교사가 교단을 떠나고, 교사들과 학생들의 지서 연행이 잦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웠고 마을 분위기는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Q. 그럼 당시 이 고문치사사건이 4·3 발발을 더욱 부추겼다고 볼 수 있을까요?
A. 조천지서 고문사건 외에도 뒤이어 발생한 모슬포지서 고문치사 사건이나 금릉리 총살사건 등은 민심을 극도로 자극했습니다. 4·3이 발발하게 된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미군정도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조천지서 경찰관 5명 모두에게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4·3이 발발하면서 경찰에 대한 조치는 유야무야 되었고, 조천중학원 원장이었던 현보규는 1949년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총살 집행된 뒤 암매장되었습니다. 실제로 2008년 당시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을 통해 현보규의 신원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Q. 현재 조천중학원 터에 4·3의 흔적은 남아있나요?
A. 아쉽게도 흔적이 남아있지도 않을뿐더러, 현재의 조천중학교가 1950년에 개교하면서 조천중학원을 계승하지도 않았습니다. 4·3과 연계되었다는 이유로 같은 시기에 폐교된 하귀중학원은 하귀중학교로 계승된 것을 비교하면 매우 아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천지역이 항일정신으로 자존심이 강한 지역이고 이런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4·3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천중학교가 조천중학원을 승계하면서 이런 기록들을 이어 나갔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Q. 유적지 관리실태는 어떤가요?
A. 유적지 안내판 조사 결과 현재 부지는 제주시동부보건소 조천보건지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4.3과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없었습니다. 4.3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니만큼 안내판을 세우고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4.3유적지 종합관리계획>(2019.12)에서도 조천중학원 옛터 등 주변 관련 역사 부지를 매입해 기념관을 조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조천중학원 옛터의 경우 국가 소유 부지이므로 따로 매입하는데 비용이 들지 않고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안내판을 설치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안내판 설치 시, 이동약자의 접근성을 보장해야하고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 설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듣기:http://jeju.local.cbs.co.kr/aod/aod_popup.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