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영역으로 건너뛰기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7월 31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진아영 할머니 삶터 전경.
진아영 할머니 삶터 전경.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은 한림읍에 있는 '진아영 할머니 삶터'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Q. 진아영 할머니 삶터라면 월령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A. 맞습니다. 월령리는 선인장 군락지로 유명한 곳인데요. 진아영 할머니 삶터를 찾아가는 입구 해변에는 조그만 모래사장이 있어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올레 14코스가 이곳을 지나가고 있어 관광객이 자주 찾아오는 곳입니다. 이곳 작은 마을에 제주4·3의 아픔을 간직한 할머니의 삶과 더불어 4·3으로 인해 후유장애를 입은 분들을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곳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Q. 진아영 할머니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A. 1949년 1월 잔인한 토벌이 자행되던 시기에 진아영 할머니는 한경면 판포리 고향집 울담 밑에서 토벌을 나온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당시 피범벅이 되어있는 할머니를 살펴보니 얼굴 쪽에 총상을 입어 턱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할머니를 도와 집으로 모시고 온 친척이 죽음보다 못하다고 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Q. 그때 당시에는 치료 한 번 제대로 받기 힘들었을 텐데요.

A. 그렇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할머니는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 아픔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할머니는 이때부터 턱에 하얀 무명천을 두르고 다니셨어요. 총상으로 인한 몰골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그 후 할머니는 진아영이라는 이름 대신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습니다.

Q.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아닌 4·3의 광풍으로 인해 새겨진 이름으로 삶을 살아오셨던 거네요.

A.할머니는 턱 총상 이후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음식도 제대로 씹지 못해 늘 위장병을 달고 사셔야 했습니다. 당시 할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어 고향 판포리를 떠나 사촌과 언니가 살고 있던 지금의 한림읍 월령리로 이주하셨습니다.

Q. 현재 '진아영 할머니 삶터'로 보존되고 있는 곳이 진아영 할머니께서 월령리로 이주한 뒤로 쭉 살고 계셨던 곳인가요?

A. 그렇습니다. 2004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삶터는 몇 년간 방치됐었습니다. 잡초만 무성했던 삶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차 희미해져 가다가 2008년 마을주민들과 주민자치연대 회원들, 시민사회단체 분들 등 다 같이 뜻을 모아 삶터 보존회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진아영할머니 삶터보존회에서 세운 안내판.
진아영할머니 삶터보존회에서 세운 안내판.

Q. 할머니의 삶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삶터보존회가 만들어졌군요?

A. 2008년 2월 15일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고사를 지내고 삶터를 정비했습니다. 당시 고사의 축문 내용을 살펴보면 '잊어서는 안 되는 일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 하기에 우리는 할머니의 삶터를 보존하려 합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게 우리 후세대들의 몫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던 축사 내용이었어요.

Q.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는 할머니가 살아생전 사용하셨던 살림살이가 그대로 남아있다고요?

A. 할머니가 쓰던 손때 묻은 이부자리, 옷가지, 주방도구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데요. 행여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전시된 물건들은 함부로 만지지 않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내부. 할머니가 쓰던 손때 묻은 물건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내부. 할머니가 쓰던 손때 묻은 물건들.

Q. 사용하셨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할머니가 지금도 옆에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전시된 물건 중에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어요. 바로 자물쇠인데요. 4·3의 충격으로 잠깐 집을 비우거나 할 때도 자물쇠로 문을 꽁꽁 잠그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훔쳐 갈 것도 없는 집을 나서서 근처에라도 다녀오실 때면 꼭 자물쇠로 문을 잠그셨다고 합니다. 4·3의 공포가 할머니의 남은 생애를 끈질기게 붙들게 했음을 보여주는 물건이죠.

Q. 평생을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옵니다.

A. 할머니는 4·3의 참혹함과 억울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인이었습니다.진아영 할머니 삶터에는 할머니의 살아생전 모습이 담겨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볼 수 있는데요. 평생을 고단한 몸으로 먹거리 한 번 제대로 씹지 못한 채 살아낸 인생을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영상에서 그려지는 것과는 달리 할머니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밝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돌담에 새겨진 '무명천 할머니 삶터'
돌담에 새겨진 '무명천 할머니 삶터'

Q. 그렇군요. 진아영 할머니 삶터가 여러 방면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인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제주4·3의 과정에서 여성들이 겪은 고초와 진아영 할머니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주민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3 후유장애로 인해서 한평생 고통 속에 살다 가신 할머니의 삶을 우리가 기억하고, 4·3의 아픈 상처를 우리 후세들이 반드시 기억하는 교육의 장으로도 의미가 있고요.

Q. 4·3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하게 되는 그런 곳인 것 같습니다.

A. 맞습니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회가 결성된 이유처럼 다시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4·3의 아픔을 우리가 기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내부. 할머니가 쓰던 손때 묻은 물건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내부. 할머니가 쓰던 손때 묻은 물건들.

Q. 진아영 할머니 삶터의 경우 다른 4·3유적지와는 달리 보존이 잘 되어있는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회에서 진아영 할머니 생활공간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관리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방문자 스스로가 떨어진 쓰레기도 줍고 잡초도 뽑아주면서 주변을 정리해야 합니다. 저희가 현장을 방문하면 꼭 풀 한 포기라도 뽑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Q. 진아영 할머니처럼 4·3 이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오신 분들 중에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으신 분들이 많지 않다고요?

A. 그렇습니다. 4·3 희생자지만 여전히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건데요.진할머니의 경우에도 4·3 이후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해 평생을 톳을 따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들어서야 후유장애를 인정받았지만, 국가가 지원해준 건 고작 850만 원 남짓의 치료비뿐이었습니다.

무명천 할머니

허영선(시인)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꽃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Q. 현재 후유장애인으로 공식 인정된 분들은 몇 분 정도 되시나요?

A. 4·3위원회 심의를 통해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된 사람은 195명입니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후유장애로 인정받은 희생자는 아주 극소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식 인정된 사망자가 1만 4천 명이 넘어갈 정도로 큰 사건인데, 후유장애인이 200명이 채 안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숫자입니다.

Q. 왜 그렇게 후유장애인 숫자가 적은 건가요?

A. 우선은 신고를 너무 늦게 받아서 그렇습니다. 현재 살아 계신다 하더라도 4·3 당시 심한 고문을 받고 팔,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후에 그 상처들이 다 아물어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죠. 또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4·3과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당시에 병원시설이 제대로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 진료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4·3과 연루되었던 것을 극도로 꺼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상흔이 몸에 남아있는 것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증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또 중증의 부상자들은 일찍 돌아가셨기도 했고 너무 오래전이라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숫자가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그렇군요. 후유장애의 인정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A. 후유장애의 인정 기준을 4·3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로 보고 있지만, 지금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를 인정한 적은 거의 없고 최근 들어서야 단 한 건에 대해 인정을 했습니다.

'희생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4·3 당시 피해로 후유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의사 소견서가 필요하지만, 4·3은 수십 년 동안 발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에 4·3 당시 토벌대나 무장대에 의해 다치는 피해를 입었어도, 관청이나 의료기관에 신고할 때는 다른 사유를 들어 신고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Q. 괜히 4·3 이야기를 꺼냈다가 연좌제 등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제대로 신고조차 할 수 없었던 거군요.

A. 그렇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4·3 당시에 실제로 피해를 입었더라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4·3평화재단의 자료를 보면 후유장애인 신청을 했는데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80명 가까이 되고 스스로 신청을 철회한 분들도 10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입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4·3생존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한 4·3트라우마센터가 지난해 5월부터 시범 운영되고 있다고요?

A. 네. 치유프로그램과 심리상담, 도수치료와 물치치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센터가 개소한 지 1년 만에 560명 가까이 등록하고, 만족도 조사 결과도 높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센터의 경우 제주 시내에 위치해 있어 제주시 읍면지역과 서귀포시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들은 찾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령이신 분들은 더더욱 힘들겠죠. 마을 단위의 보건소나 쉼터 등 접근 가능한 시설을 통한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더 많은 4·3희생자와 유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동약자인 후유장애인과 유족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 방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혹시 직접 만나보신 4·3 후유장애인분들도 계신가요?

A. 후유장애인협의회(지금은 생존희생자협의회로 명칭이 변경됨) 회장이신 오인권 어르신이 대표적인 4·3후유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성산포 터진목에서 어머니와 함께 총을 맞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분이시거든요.

또 예전에 후유장애인협의회 총무를 하셨던 어르신도 잠을 자다가 죽창에 얼굴을 맞고 머리를 다치셨는데요. 그 상흔이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또, 애월에 거주하고 계시는 양경숙어르신은 당시 동네 회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지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시력을 잃으셔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들으면 정말 저런 고난을 어떻게 견뎌내셨는지 가슴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Q. 4·3 당시 목숨을 잃은 분들 외에도 이렇게 장애를 갖게 된 분들에 대한 처우는 어떤가요?

A.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이 되면 지방비에서 생활보조비를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까다로워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지속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현재 갖고있는 장애가 4·3 당시에 생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사실상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분들에 대한 후유장애인 인정의 기준을 마련해서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심하게 겪은 분들에 대해서도 장애를 인정해줘야 할 것입니다.

Q. 지난 2월 제주4·3특별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4·3이 새 국면을 맞고 있는데요. 4·3후유장애인과 관련한 문제는 개선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A. 후유장애인으로 등록된 분들과 면담을 진행했는데요. 이번 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통과되는 걸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시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망한 희생자와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 할 것이고, 배·보상금이 많지 않은데 지금 지원해주는 생활지원금마저 더 이상 지원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국가배상이 끝났으니 더 이상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금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거죠. 배상금이 나오더라도 지원을 계속해주거나, 그것이 안 된다면 배상금과 현재의 지원 중 하나를 선택해서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는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나요?

A. 진아영 할머니 삶터 마당에는 삶터보존회에서 세운 공간에 대한 안내문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4·3유적지 안내판은 설치하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안내판을 설치하는 이유는 제주4·3의 현장 대부분이 원형과 위치를 알 수 없고 역사적 사실을 알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하지만 진아영 할머니 삶터는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고, 집 안에 들어가면 영상을 통해서 4·3 이후 할머니의 삶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판 설치보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곳을 가시는 분은 모든 것을 있던 그 자리에 놓아 주시기를 바라고 떨어진 휴지 한 조각, 자라고 있는 잡초 한 줌 뽑아주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관련 글들

국내외 연대활동
2024.11.12.

[공동기자회견] 전쟁 프로세스를 평화 프로세스로! 윤석열 정권의 정책 전환을 촉구한다

자세히 보기
제주다크투어 이야기
2024.10.30.

참 정부가 무도하고 너무 악질이다

자세히 보기
제주다크투어 이야기
2024.10.30.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재판 있을 수 없다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