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6월 19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제주도 한라산 남쪽의 서귀포지역과 정방폭포에 얽힌 4·3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Q. 5.10선거에서 남제주군 지역은 제주지역과 다르게 높은 투표율이 나왔다고 전 시간에 말씀해주셨는데 그런데도 피해가 컸나요?
A. 1948년 5월 10일 선거에서 제주지역 3개 선거구 중에서 2개 선거구는 무효가 되었지만, 남제주군 선거구는 투표율이 80%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4·3의 광풍을 빗겨갈 순 없었습니다.
Q. 정방폭포 또한 4·3 역사의 현장 중 한 곳이었군요?
A. 그렇습니다. 정방폭포는 제주도 대표 관광지로 천지연, 천제연폭포와 더불어 제주 3대 폭포이며 제주 올레 6코스 중 한 곳이기도 하죠. 현재의 정방폭포는 제주의 아름다움과 아픈 과거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Q. 4·3 당시 정방폭포도 학살 현장이었던 건가요?
A. 그렇습니다. 정방폭포는 4·3 당시 200명이 넘는 도민이 목숨을 잃은 서귀포지역 최대 학살터였습니다. 정방폭포가 있는 서귀리는 서귀면뿐만 아니라 산남지방의 중심지였습니다. 면사무소, 남제주군청, 서귀포경찰서가 모두 서귀리에 있었습니다. 2연대 1대대가 주둔했고, 근처에 서북청년단 사무실도 있었습니다. 토벌대에게 잡혀 온 사람들이 갖은 고문과 고초를 겪다 정방폭포 일대에서 학살되었던 것입니다.
Q. 군과 서청이 주둔했다면, 주민들은 매일 같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토벌이 강화되던 시기에 서귀리는 토벌대의 주요 거점지였습니다. 서귀면사무소에 2연대 1대대가 설치되고, 서귀리 시내의 공장건물이나 창고건물 등 규모가 있는 건물들은 군부대가 수용소로 전용했는데 수감자로 넘쳐났습니다.
특히, 군부대 정보과에서 주민들을 고문하고 취조했던 농회창고는 악명이 높았습니다.
Q. 농회창고요?
A. 농회창고는 당시 2연대 1대대 2과(정보과)에서 취조실 및 유치장으로 활용했던 곳인데요. 1대대 본부가 서귀면사무소에 주둔했었는데 농회창고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주둔한 대대본부는 산남지방 토벌의 주력부대였습니다.
농회창고에는 서귀면 및 중문면 등 서귀포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대정면, 안덕면, 표선면에 이르는 산남지방 주민들 중 도피했다가 붙잡히거나 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대부분 관할 지서를 거쳐 농회창고로 이송됐습니다.
Q. 서귀리 주민뿐만 아니라, 산남지방 일대 거주하는 주민이면 모두 이곳으로 이송됐다는 건가요?
A. 그렇습니다. 4·3 당시 제주도 곳곳 군부대 주둔지와 취조실은 도민들에게 악명을 떨쳤는데요. 이곳 농회창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혹독한 취조는 물론이고 대부분 즉결 처형자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즉결처형자들이 바로 정방폭포와 ‘소남(낭)머리’ 일대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지금은 서복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는 정방폭포 상단은 당시에 전분공장, 단추공장, 통조림공장 등이 몰려 있었고 이들 공장이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었습니다.
Q. 토벌대의 주둔으로 서귀리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순조롭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서귀리 주민들은 더욱 숨 막히는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1948년 11월 7일에는 무장대가 서귀포를 습격하면서 토벌대의 학살극은 점점 더 잔인해져만 갔는데요. 토벌대가 관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대거 끌고 와 총살했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서귀리 주민도 포함됐습니다.
Q. 무장대가 서귀포 중심지를 습격한 것인가요?
A. 1948년 11월 17일 새벽에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가 서귀포 중심지에 기습해서 방화한 사건인데요. 토벌대가 토벌을 위해 출동한 사이에 서귀포 중심지를 습격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숫자 불명의 유격대가 서귀포를 공격해서 경찰지서 1채와 건물 7채를 방화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장대는 비행기가 날아와 기총소사하자 유유히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날의 사건은 사건 규모에 비해 인명 피해가 크지 않았는데 전면 공격을 하지 못하고 위세만 부리다 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Q. 무장대가 토벌대 본부가 있는 서귀포 중심지까지 습격했다면 토벌대 입장에서는 상당한 분노와 위협감을 느꼈을 것 같은데요?
A. 당시 제주읍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경찰서가 있었던 곳이라 토벌대 입장에서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장대가 서홍리 방면으로 퇴각을 했기 때문에 서홍리 쪽으로 매일 토벌을 나갔다고 합니다.
Q. 주민들을 대상으로 보복 학살을 자행했던 거네요.
A. 그렇습니다. 당시 서귀면사무소에 2연대가 주둔했었고, 서북청년단 사무실도 따로 있었는데요. 총살 집행은 군인들이 했지만 서청이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에 나와 있는 증언에 따르면, 잠을 자다가 아버지께서 이유 없이 끌려가 아무런 취조도 없이 무조건 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지가 양복점을 했는데, 서청단원들이 옷을 맞춰 입고도 돈을 주지 않자 이를 재촉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었다는 겁니다. 당시 터무니없는 이유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합니다.
Q. 그렇군요. 서청의 사무실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면 서청의 위세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1949년에는 2연대에 서북청년단으로만 구성된 특별중대가 있을 정도로 2연대와 서청은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서청의 횡포가 극심해지면서 제주 출신 경찰들조차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청은 무장대와의 충돌이 벌어지지 않을 때도 일상에서 주민들을 괴롭혔다는 겁니다.
Q. 그렇군요. 서귀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근처 산남지방 일대 주민들도 수용소로 끌려와 학살당했다고 하셨는데요. 그에 대한 내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A. 우선 중문면 도순리 주민이 희생된 사건부터 말씀드릴게요. 1948년 11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도순국민학교에 집결시킵니다. 몇몇 사람의 이름을 부른 후 호명된 사람들은 서귀포로 끌려가 총살됐습니다.
Q. 미리 작성한 명단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A. 당시를 겪었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호명을 받고 희생자 대부분이 유지급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고 합니다. 마을에는 특별히 좌익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입산해 무장대로 활동하던 이만흥이라는 사람이 유일하게 있었습니다. 도순리에는 이만흥의 입산으로 경찰의 주목을 받아 주민들이 희생당했다는 여론이 급속하게 퍼졌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이만흥이 혼자 마을에 내려왔을 때 그를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고 합니다.
Q. 산사람과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장대원을 경찰에 넘긴 거군요?
A. 그렇습니다. 비극이라고 할 수 있죠.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응이나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협력으로 목숨을 보장받고자 한 것이죠. 그러면서 도민과 도민 사이의 갈등의 불씨가 점점 커졌던 거고요. 하지만 토벌대는 총살극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근 마을의 경우 대게 중문리로 끌려갔는데 도순리 주민들은 서귀포로 끌려가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Q. 계속해서 주민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에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일의 삶을 장담하지 못했을 겁니다. 특히 도순리의 경우, 1948년 10월 무장대가 마을에 주둔한 응원경찰을 습격한 사건이 벌어져 토벌대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Q. 토벌대는 주민들이 무장대에 협력했다는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건가요?
A. 토벌대가 주민들을 끌고 가는 근거는 무장대를 지원해줬다는 건데요.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토벌대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취조 고문하는 과정에서 허위자백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자수하면 살려주겠다고 함정을 파기도 했습니다. 자수했던 사람들은 모두 끌려가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하게 토벌을 진행한 것입니다.
Q. 정방폭포와 관련된 다른 사건이 또 있나요?
A. 남원면 신흥리에서 불과 며칠 사이에 70여 명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홀치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Q. 홀치기 사건이요?
A. 갑작스러운 집단희생을 낚시법에 빗대어 표현한 것인데요. 당시 신흥리에 대한 소개령은 12월 14일에 내려졌습니다. 신흥리는 신흥1구 신흥2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요.신흥1구는 해변에 위치해 소개령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신흥2구는 해변에서 약 3Km가량 북쪽에 위치해 있어 소개령이 내려졌습니다.
Q. 일반적으로 소개 시기는 11월 중순쯤에 이루어지지 않았나요?
A. 그렇습니다. 신흥리 소개 시기는 한 달이나 넘긴 것으로 보아, 토벌대는 당초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던 신흥리에 대해 소개시킬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신흥리 주민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Q. 소개령이 내려지고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다가, 후에 집단희생이 발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A. 토벌대는 12월 18일 소개지인 신흥1구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청년 40여 명을 호명한 후 남원지서로 끌고 가 수감시켰습니다. 이튿날에는 청년 30여 명이 자수하기 위해 스스로 남원지서로 찾아갔습니다. 토벌대는 이 청년들을 남원지서 인근 밭이나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으로 끌려가 집단학살하게 됩니다.
신흥리 주민들이 갑자기 집단학살 된 ‘홀치기 사건’은 당시 토벌대의 토벌 전략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토벌 전략이요?
A. 네. 12월 18일은 제9연대의 토벌작전이 극에 달했을 때인데요. 이때가 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여서 경쟁적으로 무리하게 토벌을 하던 시기입니다. 토벌대는 경쟁적으로 ‘전과’를 올리기 위해 많은 주민들을 총살한 겁니다. 이 시기에 토벌대는 무장대와 교전을 벌인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중산간을 휩쓸고 다니다 은신해 있던 주민들을 총살하거나 해변마을에서 멀쩡히 살고 있는 주민들을 향해 학살극을 벌인 것입니다.
Q. 무고한 주민들을 죽여 놓고 전과를 올린 것처럼 했다는 말씀이시지요?
A. 네. 당시 1948년 12월 말 제9연대가 대전에 있는 제2연대와 맞바꿔 교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제2연대보다 더 높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토벌전을 벌인 것입니다.
미군 G-2 보고서에는 이즈음의 경비대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로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Q. 앞서 토벌대가 청년 40여 명을 호명했다고 하셨는데요. 토벌대는 무엇을 근거로 청년들을 호명한 것인가요?
A. 토벌대에게는 ‘명단’이 있었습니다. 마을에 무장대의 세력이 왕성하던 시절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 등을 제공하고 시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 내용들이 작성된 명단이 있었습니다. 일부 청년들이 자수한 이유도 이런 명단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Q. 앞선 시간에 설명해 주셨던 박성내의 ‘자수사건’과 같은 맥락이군요.
A. 그렇습니다. 이 시기에는 자수공작에 걸려 집단 학살당하는 등 토벌대가 전과를 위해 많은 주민들을 희생시켰습니다. 토벌대는 전과를 과시하기 위함인지 현장에서 즉결총살하지 않고 이처럼 주둔지로 끌고 가 주민들을 처형했습니다.
Q. 당시 정방폭포에서만 희생된 주민들의 수가 200명이 넘는다고 하셨는데요. 당시 시신을 수습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정방폭포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서의 총살극은 한날한시에 일어난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벌어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시신 중에서 자기 가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큰넓궤에서 도망쳐 나와 토벌대에게 잡힌 일부 주민들은 서귀포로 끌려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Q. 큰넓궤에서 도망쳐서 잡힌 사람들이 정방폭포에서 희생되었다고 하셨죠?
A. 맞습니다. 당시 큰넓궤에서 도망쳐 나온 동광리 주민 여러명이 정방폭포에서 학살되었습니다. 동광리 주민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총살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었지만 1년이 지난 뒤에야 현장에 갈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정방폭포 일대 해안을 뒤지면서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했지만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는 부패한 시신들 중에 가족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수습할 수 없어 학살된 가족의 유품을 넣고 무덤을 조성한 게 ‘헛묘’ 입니다.
Q. 4·3 당시 정방폭포는 서귀포지역 최대 학살터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주다크투어에서 펴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보니까 정방폭포에 안내판이 없다고 지적하셨던데요. 4·3 당시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나 추모비가 전혀 세워져 있지 않나요?
A. 지난해 9월 제주다크투어가 정방폭포를 찾았을 당시에는 ‘관광지’로서의 안내판만 설치되어 있었는데요. 8개월 만에 다시 방문한 정방폭포에는 제주4·3 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정방폭포로 진입하는 매표소 옆 기존 관광지 안내판 옆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정방폭포로 들어가려면 꼭 지나쳐야 하는 위치였고요. 유명 관광지인 만큼 영어, 중국어, 일어 등 외국어로 된 설명문도 있었습니다.
Q. 그 사이 지적사항이 받아들여져서 안내판이 설치되었네요?
A. 3년 전부터 정방유족회(회장 오순명)가 결성되어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분들을 위한 추모사업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안내판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순명 정방유족회장님은 정방폭포 일대에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신대요. 지금 서복전시관이 있는 잔디광장에 추모비를 세우고 싶어하시지만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라 추모비 설치는 어렵다고 합니다. 지금 서복전시관 옆에 소남머리라는 장소에 추모비를 세울 것으로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265명의 명단을 새겨 넣고 원혼을 달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복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당시 수용소로 사용했던 전분공장과 창고가 있었던 곳인데요. 4·3과 전혀 관련이 없는 전시관이 들어서 있어 이곳이 4·3 유적지임을 알 수 없는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정방폭포 입구에 있는 4·3유적지 안내판에도 수용소로 이용되었던 지금의 서복전시관터에 대한 설명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내용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고요, 현재 서복전시관이 있는 자리에 추가로 안내판을 설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점자 안내나 음성변환용코드도 신경 써서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듣기:http://jeju.local.cbs.co.kr/aod/aod_popup.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