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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CBS 유적지 라디오 <흔적에서 교훈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를 통해 제주4·3 유적지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에서 맡은 <흔적에서 교훈으로> 코너는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4·3유적지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매주 토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4월 세 번째 시간은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가 빌레못굴과 비학동산에 담긴 4·3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Q.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오늘은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유적지인 빌레못굴과 비학동산에 담긴 4·3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Q. 애월은 해안도로가 아름답고 공항과도 가까워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잖아요. 이곳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나요?

A. 대부분의 관광지가 4·3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유적지 두 곳 중 한 곳인 ‘빌레못굴’은 애월읍 어음리에 자리해 있는데요. 현재는 어음리가 1, 2리로 나누어져 있지만 4·3 당시에는 ‘어음리’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음리 마을에는 고지우영, 섯동네, 송에물, 닭우영, 너산밧동네 등 아름다운 자연마을이 모여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4·3 발발 전, 어음리 마을 주민들은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기도 했고 ‘양반마을’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그랬듯이 4·3 당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Q. 4·3 당시 애월읍 어음리에는 어떤 피해가 있었나요?

A.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기 전에 무장대(인민유격대)가 장악하고 있던 중산간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왓샤시위’를 하고 식량을 거둬 올려보내기도 했습니다. 때론 청년 중에는 무장대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마을이 마찬가지였겠지만 당시 낮에는 토벌대, 저녁에는 산 사람들(인민유격대)의 표적이 됐기 때문에 밤낮으로 공포에 떨며 양쪽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습니다. 한동안 사람이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어음리 마을의 한 청년이 총살당하게 되면서 마을 주민들이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Q. 조용했던 마을에 청년이 총살되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매우 놀랐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당시 산사람들의 식량 요구와 토벌대의 빈번한 구타는 있었지만, 사람이 죽는 일은 처음이라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시기에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감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Q. 청년이 총살된 사건 이후에 마을 분위기는 어땠나요?

A. 토벌대의 만행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수시로 마을을 덮쳐 청년들을 찾지 못하면 아무런 죄가 없는 노약자들에게 가혹행위를 저지르고,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을 붙잡아 납읍국민학교에서 하루 종일 구타를 하는 등 무장대(인민유격대)에 대한 정보를 캐낸다는 구실로 그게 누구든 눈에 보이는 사람이면 가만두지 않았던 겁니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토벌대에게 식량 등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기 직전인 10월경에는 마을에 토벌대 병력이 주둔했다고 합니다.

Q. 마을에 토벌대 병력을 주둔시켰다는 건 본격적으로 토벌 작전을 실시하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는 거네요?

A. 그렇습니다. 토벌대는 어음리를 ‘폭도마을’로 규정했고, 철도경찰 20여 명이 마을로 들어와 청년이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소개령이 내려졌던 11월 15일 이후에는 마을 곳곳을 수색하여 청년들을 끌어내 구타하고 총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Q. 소개령이 내려졌다는 건 해안가 마을로 이주하라고 했던 거잖아요? 근데 마을주민들이 해안가 마을로 이주를 하지 않았던 건가요?

A. 일부는 해안가 마을로 내려갔지만 많은 사람이 기회를 놓쳤어요. 피신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소개령 소식을 못 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내려갔다고 해서 모두가 무사했던 것도 아닙니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빠져 있으면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서 총살을 했기 때문에 해안가로 내려갔다가도 다시 마을로 몰래 돌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숨을 곳을 찾아 나섰던 것이지요.

평소에는 굳게 잠겨있지만 답사 당시 학술조사중이라 열려있던 빌레못굴 입구 모습.
평소에는 굳게 잠겨있지만 답사 당시 학술조사중이라 열려있던 빌레못굴 입구 모습.

Q. 그렇군요.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가 어음리에 있는 ‘빌레못굴’이라고 하셨는데, 당시 토벌을 피하고자 이 굴에 들어가 피난을 했었던 건가요?

A. 맞습니다. 빌레못굴은 당시 어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학살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어음리와 주변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학살터였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해안선 5km 이상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로 간주한다는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몸을 숨길 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Q. 중산간 마을을 떠나 산속이나 해안마을이 아닌 굴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까요?

A. 가족 중에 도피자가 있는 집안은 해안마을로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었던 마을 주민들은 여기저기 숨어 은신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비바람과 추운 겨울 견디기 위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 들어간 곳이 천연 동굴이었던 것입니다.

Q. 당시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들어가 생활을 했다는 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가 힘드네요. 생활하기 괜찮았을까요?

A. 마을 주민들이 한 줄기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선택 했던 건, 조금만 버티면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들어갔을 거로 생각합니다. 살기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빌레못굴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입구가 좁습니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굴 안은 상당히 넓은데요. 총 길이가 11,749m로 용암동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 지정돼 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숨어서 생활하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거죠.

Q. 주민들의 은신처였던 이 굴이 끔찍한 학살터라는 건 결국엔 발각되었다는 뜻이겠네요.

A. 그렇습니다. 빌레못굴은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던 목초지와 경작지 부근에 있었지만 4·3 때까지만 해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입구가 작고 수풀로 우거져 있어 작은 ‘궤’ 정도로만 알았지, 큰 굴이 있을 줄은 몰랐던 거죠. 겨울철이면 굴의 온기 때문에 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고 합니다. 굴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 토벌대에 의해 결국 발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Q. 어떤 사람들이 굴에서 생활했나요?

A. 당시 빌레못굴에는 어음리 주민뿐만 아니라 장전리, 납읍리, 상귀리 등 인근 마을 주민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당시 마을에는 ‘산불근 해불근(山不近 海不近) 하라’ 즉 산과 바다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30여 명은 거뜬히 숨어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이 마을에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Q. 추운 겨울, 굴에서 모락모락 피어났던 연기로 굴이 발각되었다고 하셨는데요.

A. 동굴 내부의 온도는 겨울철이나 여름에도 일정한데, 겨울에는 따스한 온기가 품어져 나오면서 동굴 입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1949년 1월 16일 굴이 발각됐고 토벌대는 그 속에 숨어 있던 사람 중 29명을 굴 입구에서 학살했다고 합니다.

Q. 빌레못굴 속이 상당히 깊다고 하셨는데, 안으로 깊이 도망쳤다면 생존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없었던 건가요?

A. 당시 굴이 발각되고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마을 주민들은 급히 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토벌대가 굴 밖으로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유혹하는 바람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밖으로 나왔고 토벌대는 굴 입구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바로 학살했다고 합니다. 당시 두어 살 난 딸을 업고 굴속 깊이 도망친 엄마는 결국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굴속에서 굶어 죽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신은 1971년 동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Q. 토벌대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무차별 학살극이었네요.

A. 그렇습니다. 이 시기 토벌 작전의 특징은 무차별 학살극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토벌 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에 이야기에 따르면, 토벌대는 굴 안에 있던 서너 살 난 어린아이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게 했다고 합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잔인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던 겁니다.

Q. 들으면서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잔인하고 놀라운 일들이 그 당시에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는 게 상당히 마음이 아픈데요. 빌레못굴이 4·3유적지였음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있나요?

A. 4·3과 관련된 내용은 있지만, 안내판에 훼손된 부분이 있어 내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작년 다크투어 유적지 안내판 조사보고서에도 지적했던 부분이었는데요. 지난 20일(화요일) 모니터링을 위해 답사를 다녀온 결과, 안내판은 여전히 정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빌레못굴 유적지 입구 갈림길.
빌레못굴 유적지 입구 갈림길.
훼손 된 빌레못굴 안내판.
훼손 된 빌레못굴 안내판.

Q. 안내판 정비 외에도 지적했던 내용과 개선된 내용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A. 작년 안내판 조사 당시 지적했던 내용은 안내판의 훼손, 안내판에 기재되어 있는 잘못된 주소, 유적지 중간 진입로에 있는 갈림길에 위치를 가리키는 안내판 설치, 이동약자의 접근성 보장 등이 있었는데요. 아쉽게도 이 중 하나도 개선된 점은 없었습니다.

인터넷에 주소를 찍어 장소를 찾아가긴 했지만 들어가는 입구에 4·3유적지라고 적혀있는 조그마한 팻말 말고는 이곳에 4·3유적지가 있다는 걸 알리는 안내판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조그마한 팻말도 사실 그냥 지나칠 수 있겠더라고요. 입구를 들어가다 보면 서너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요. 비포장도로이기도 하고 안내판이 없기 때문에 처음 찾는 분들이나 안내자 없이 찾아가시는 분들은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헷갈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림길에 길 안내판이 세워지면 유적지 찾기가 더욱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Q. 이 외에도 다른 지적사항은 없나요?

A. 사실 애월지역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대표지역이잖아요. 외국인 관광객분들도 많고요.

외국어로 된 안내문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외국인이 방문했을 경우 유적지와 관련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외국어로 된 안내문을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적지 입구 근처는 포장도로로 되어있으나 정작 유적지 앞까지는 흙길로 되어 있어서 이동약자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도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팽나무를 베어버린 자리에 현재는 학원동민회관이 들어서있다.
팽나무를 베어버린 자리에 현재는 학원동민회관이 들어서있다.
학원동민회관 측면 모습
학원동민회관 측면 모습

Q. 두 번째로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A. 두 번째 유적지는 마찬가지로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비학동산’ 입니다.

Q. 비학동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나요?

A. 비학동산을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해방 이후 하귀리 마을의 분위기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4·3 당시 ‘마을에 요망진(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다’나 ‘청년이 센 마을은 희생이 컸다’는 말이 정설로 굳어져 있을 정도로 뛰어난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하귀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항일운동이 왕성했던 마을입니다. 항일민족의식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내려왔고, 건준위(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던 마을입니다. 1946년에는 하귀중학원이란 중등교육기관을 세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Q. 당시 경찰은 하귀리 마을을 오히려 불온시하여 탄압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습니다. 당시 하귀리와 경찰의 본격적인 대립은 3·1발포사건 후 시작되었습니다.

3·1발포사건 직후 전도적인 검거선풍 와중에 하귀초등학교 교장이 검거되기도 했고, 후임으로 이북 출신 교장이 부임하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미군정은 하귀리에 계속 탄압을 가했고 하귀중학원생 대부분을 1947년 제주경찰서에 구금하기도 했습니다.

서청과 응원경찰을 앞세운 미군정의 탄압이 계속됐고 청년들은 곧 쫓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Q. 4·3 발발 후에 분위기는 어땠나요?

A. 5·10선거가 북제주군에서 무효화된 이후 강력한 토벌 작전으로 무장대의 공세가 주춤했는데요. 당시 하귀리에는 경찰지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으로 외도지서, 마을 서쪽에는 신엄지서가 위치하면서 오히려 토벌대의 지배를 받기 쉬운 위치가 되면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후에 토벌대는 숨어버린 청년들을 찾기 위해 동원령을 내리기도 하는데요.

Q. 어떤 동원령이었나요?

A.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2월 5일경에 외도지서의 동원령이 내려지면서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월동용 장작 마련을 위해 톱과 도끼 등을 가지고 지서 앞으로 모이라는 노력동원령이었는데요.

그 당시 마을에는 대부분의 청년이 도피해 있었기 때문에 주로 노인과 부녀자들, 무장대(인민유격대)와 관련이 없는 청년들이 그 명령에 동원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동원령은 무장대(인민유격대)를 색출하기 위한 함정이었고, 자진했던 청년들은 마구잡이로 구타를 당한 뒤, 차에 태워져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한국 전쟁 발발 후 집단학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Q. 하귀리 마을에 초토화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거네요?

A. 그렇습니다. 1948년 겨울부터 1949년 봄까지 하귀리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잔혹했고 상상 그 이상의 학살극들이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인 학살극 중 하나가 ‘비학동산 학살사건’ 입니다.

Q. ‘비학동산 학살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A. 12월 5일 ‘외도지서 장작사건’이 있고 난 뒤 12월 10일에 ‘비학동산 학살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비학동산이 있는 개수동(후에 학원동으로 개명)에는 뛰어난 청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청년들은 제주농업학교 출신이거나,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외에도 교육계에서 활약했던 사람,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던 사람 등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토벌대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토벌대는 개수동 청년들에게 12월 7일 자수공작을 펼치게 되는데요.

Q. 자수를 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A. 토벌대는 청년 10명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단을 근거로 자수하라고 마을에 통보했습니다.

이 명단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지만, 토벌대는 자수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크게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틀 전 ‘외도지서 장작사건’으로 동원됐던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쉽사리 토벌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Q. 마을 주민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나요?

A. 주민들은 대책회의를 진행했지만,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될 거라는 것을 직감했던 거죠.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10명 중 한 명인 김호중은 용기를 내어 “내가 먼저 출두하겠다.” “내가 무사하면 경찰의 약속이 증명되는 것이니 그때에 뒤이어 자수하라”며 홀로 외도지서로 갔습니다.

Q. 그 후에 청년은 어떻게 되었나요?

A. 안타깝게도 김호중은 12월 7일 총살됐습니다.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지목된 나머지 청년들은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후 토벌대는 개수동 마을에 들이닥쳤고 마을 주민들을 ‘비학동산’으로 집결시켰습니다.

Q. 비학동산에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A. 처참한 학살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비학동산에서 토벌대가 저지른 학살극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토벌대는 ‘도피자가족’을 골라내 집단학살했는데요. 도피자가족 뿐만 아니라 장전리와 광령리에서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 내려온 사람들도 함께 총살했습니다.

현재 동민회관이 세워진 자리에 팽나무가 있었는데요. 토벌대는 팽나무에 임산부를 발가벗겨 매달아 놓고 철창으로 찔러 학살하는 등 비인간적인 야만성을 드러내는 학살극을 저질렀습니다. 주민들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토벌대는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는 좌우이념을 떠나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고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무너진 현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Q. 당시 토벌대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학살극은 참으로 믿기 힘든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로만 듣는데도 충격이 상당히 큰데, 총살 현장에 있었던 마을 주민들의 공포감과 암담함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A. 그렇습니다. 총살현장에서 생존한 마을 주민들의 트라우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주민들은 이 사건을 연상시키는 팽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학원동민회관을 세웠습니다.

당시의 고통은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주민들의 마음을 괴롭혔던 것이지요. 깊게 박힌 팽나무를 응어리 베듯 베어야만 했던 주민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Q. 그렇다면 당시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A. 안내판은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사건이 알려져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주민들은 이 사건을 연상시키는 팽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학원동민회관을 세웠기 때문에 현장에서 이곳의 역사를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4·3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안내판 또는 당시를 잊지 않기 위해 현장을 보존하자고 저희는 많이 주장하는데요. 이렇게 트라우마가 깊게 남아있는 곳에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마을 주민들의 상처를 들춰내는 것과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Q. 그렇겠네요. 너무나도 끔찍했던 기억을 지우고자 나무도 베어버렸는데 그곳에 다시 안내판을 세우자고 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겠네요.

A. 네. 역사의 현장을 제거한다고 해서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잔혹한 역사를 사실대로 알려 가해자의 폭력성을 알리고 다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프지만 사실을 기록해서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정규 방송 시간 이후 부터 다시 듣기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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