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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0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관련 군사재판 수형인 30명에 대한 57차 직권재심 재판이 열려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에는 같은 법정에서 일반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18차 직권재심 재판이 열려 역시 모두 무죄를 선고를 받았다.

오전에 진행된 군사재판 직권재심에서 김정은 변호인은 최종변론에서 최근에 시도되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4‧3의 역사를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재판 현장에서 기록한 변호인의 최종변론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3년째 직권재심 재판이 열리고 있다. 많은 희생자에게 무죄선고가 내려졌고, 그에 따라 여러 배‧보상의 절차도 진행 중이다. 그동안 참여했던 재판에서 4‧3과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무죄를 청구해달라는 변론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4‧3과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간, 단 몇 사람의 잘못된 결정만으로도 같은 역사가 반복될 수 있음을, 시민들이 탄탄하게 쌓아 올려온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 모두 지켜봤다.
지금까지 직권재심 재판을 통해서 많은 4‧3 희생자 유족을 만났다. 희생자와 유족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 잘 알고, 자신의 아픔을 느낄 정도의 유족도 있었지만, 희생자의 생전에 희생자로부터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유족의 증언을 다룬 뉴스도 많았다. 자신이 혹은 이 사실을 알게 된 또 다른 가족이 고통을 겪게 될까 두려웠던 것 같다. 결국 4‧3으로 그리고 그 희생자들이 오랜 기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몇 사람의 잘못된 결정과 자신이 소리 내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다. 4‧3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배‧보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결국 자신의 아픔을 용기 내어 세상에 알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듣고 공감한 사회가 결국 4‧3희생자에 대한 직권재심까지 이끌어 냈다.
적어도 4‧3 희생자 유족의 말씀을 듣고 싶다.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그래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듣고 공감할 수 있게, 공감하는 시민들이 연대하여 몇 사람의 잘못된 판단을 막을 수 있게.
더 이상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피고인들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해달라.
- 제주다크투어
2024.12.10. 재판 방청 수기 기록

이후 재판에 참석한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망 한만년은 기록에 따르면 내란죄 위반으로 수형인이 되었다. 그의 자녀 한00은 마이크를 들었다. “나는 아버지 때문에 가파도 섬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어부 생활을 해왔다. 아버지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 했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일궈왔다. 오늘 이렇게 재심재판으로 무죄를 선고받아 70년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좌중희의 조카는 “조카지만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로 인해 살면서 신원조회로 큰 영향을 세 번 정도 받았다. 내 인생에서 굉장히 안 좋게 작용한 경우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바로잡게 되어 고맙다”라고 연좌제 피해 경험을 밝혔다.

망 김형인의 동생 김00은 93세로 법정을 찾았다.“어릴 때 어느 날 경찰들이 오빠를 심어갔다. 서울형무소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리다가 6‧25사변이 나버렸다. 이것밖에 모른다.”라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증언하였다. 망인의 조카 김00은 “부모님께 전해 듣기로는 대동청년단에서 우리 조부모한테 금전을 요구했는데, 그것을 안 준 것 때문에 보복을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법정에서 들은 내용에 대한 것은 몰랐다. 이번 재심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망 이종주, 이종인의 동생 이00은 “두 오빠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한 맺힌 그 원통함을 여기에서 느끼면서 여러 생각이 스쳤는데, 너무 비참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편안하게 잠드실 것이고, 우리 오빠들도 대한민국에 다시 태어난 것 같다. 지금까지 누명을 썼다가 오늘은 벗었다. 감사하다”라고 유족의 아픔과 재심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망 양을생의 손자 양00은 “나는 잘 모른다. 아버지가 스트레스로 인해서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연좌제도 있고 하니까 집안이 힘이 안 들었겠나? 동네가 지금도 이쪽 편이다, 저쪽 편이다 갈라져 있다. 그러나 지금쯤 와서라도 국가에서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에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모든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증언했다.

망 진달근의 자녀 진00은 “오늘 같은 유족의 입장에서 많은 공감을 하고 있다. 잠깐 가슴이 울컥한다. 아버지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아버지는 원래 서귀포 서홍리라고 중산간 부락에 살았다. 그러다가 4‧3의 상황에서 낮에는 서북청년단이, 밤에는 제주도 말로 ‘폭도’라고 불렀던 사람들에 의해 괴롭힘을 피해 아버지가 산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에 큰어머니는 아버지를 찾다가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현재 정방폭포에서 총살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고, 그사이에 낳은 자식이 형 두 명이 있었다. 작은형은 46년생인데, 큰어머니의 등에 업혀 정방폭포로 같이 끌려갔는데, 총살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작은 형은 이후에 월남전에 참전하여 고엽제 후유증으로 70대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아버지는 서홍리에 살다가 수형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친척들이 있는 서홍리 서쪽 호근리로 이주하여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도 하원리에서 결혼생활을 하다가 4‧3을 피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후 두 분이 만나 칠 남매를 낳고 살았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가진 것이 없으니 친적집의 도움을 겨우 받으며 정말 힘들게 살았다. 아버지는 칠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밀감밭에 담을 쌓는 동챙이(석공)으로 일하며 동네 분들에게는 항상 손해 보는 쪽으로 살아가다가 18년 전에 88세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경제적으로 힘들다보니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격한 감정을 갖고,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생각했다. 그래도 오늘 재판으로 울컥한 심정을 느낄 만큼 4‧3의 애환을 풀어줘서 감사하다”라고 가족의 아픈 이야기를 전했다.

이후 방선옥 부장판사는 30명의 수형인 희생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다음과 같이 소감을 남겼다. “1년 동안 재심 재판을 하면서 많은 가족께서 ‘이런 사건들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해주셨다. 당연히 내가 이런 재판을 또 하려나 생각했었다. 앞에서 변호인이 말씀하셨듯이 이 사건 재판을 왜 하는가? 계엄이 있었고, 계엄에 따라서 부당한 피해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지난주에 계엄이라는 상황을 맞닥뜨렸고, 이 재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기억을 또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계엄을 막아섰고, 이제는 조금 안정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없기를 바라고, 오늘 재판에 참석한 가족들의 삶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무죄선고로 마음의 위로가 되길 바란다”라며 이번 재판 변호인의 최종변론에 이어 최근의 비상계엄에 대한 우려와 유족들에 대한 위로의 인사를 전했다.

오후 2시에 다시 시작된 재판은 일반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재심재판이 열렸다.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유가족들의 증언을 소개한다.

망 김태중은 1949년 11월 제주지방법원에서 법령 제19호 위반죄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가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19명의 피고인들과 함께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날 법정에 참석한 자녀 김00는 “어렸을 때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 했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것이 오늘에야 그 한을 풀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라고 증언했다.

망 김원준은 1949년 10월 제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의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번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촌 동생 김00은 “나는 49년생이다. 그래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무장대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촌 누님이 밤에 자는데, 경찰들이 와서 잡아갔다. 나는 중문 천제연 폭포로 끌고 가 총살을 시켰다고 알고 있었다.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셔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라고 증언했다.

망 임정길은 1948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왕래방해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외손주 황00은 “외증조할머니와 어머니랑 같이 생활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가족이 끌려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가족이라고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혹시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피해를 입을까 봐 그랬다. 오히려 숨죽이고 살았고, 이런 사실을 알리지 못하면서 눈물만 짓다가 어머니께서도 작년에 돌아가셨다. 이 재판 과정을, 이 소식을 듣고 돌아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렇게 해서 외할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고, 이제 빨갱이라는 소리를 안 듣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소감을 남겼다.

망 양석보는 1950년 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그의 자녀 양00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끌려가서 그저 마을회관에서 막 맞고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모습을 어머니가 목격했다. 나도 자라면서 많은 학대를 받았다. 아버지는 광주로 끌려간 후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어 소식도 없다. 내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그래도 재심재판을 해줘서 고맙다”라고 서러운 마을을 밝혔다.

망 김지담은 1950년 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3년, 장기 4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의 외조카 부00은 “외가에는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외삼촌까지 4·3희생자다. 친가에서는 조모님도 5·10선거 즈음에 마을회관에 갔다가 폭도들한테 총을 맞아 희생되셨다. 행방불명되었던 삼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줘서 감사하다”라고 가족 전체의 4·3 희생에 대해 언급했다.

방선옥 부장 판사는 재판을 끝내며, “2024년 재심은 오늘 재판으로 마루리하고 내년 2월부터 다시 재판하겠다. 재판에서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아팠다. 피고인들의 영혼이 위로받고, 가족들도 무죄 선고로 위로를 받고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라고 위로의 말을 남겼다.

12월 3일 비상계엄에 제주4·3의 아픔과 고통 떠올려

오마이뉴스, 김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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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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