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유족 여러분은 외롭지 않습니다 .
여느 때와 같이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 장찬수 부장판사의 입장하면서 직권재심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명씩 호명된 피고인의 이름. 당시 죄명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할 증거가 있냐는 판사의 질문에 검사는 짧고 굵게 "없습니다"라고 답변합니다.
수형인 중 상당수가 20세 미만 미성년자였고, 나머지도 교사, 공무원, 농부 등 평범한 삶을 살던 도민들이었습니다. 이미 진행된 다른 재판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집에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찰이 나무하러 모이라고 해서 나갔다가 영원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판에 참석한 수형인 유족들의 발언 내용을 전합니다.
희생자 홍두식님의 며느리 윤00씨는 28세에 결혼을 하며 제주도에 입도해서 여러 제사를 지냈지만 '홍두식'님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시신은 어디있는지도 모른 채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왜 이런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의문스럽게 생각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최근 직권재심 재판에 참여하면서 알게 되었고, 제주4·3에 대해 공부도 했다며, 오늘 재판도 며느리이지만 가겠다고 해서 법정에 나오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제주4·3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역사라고 생각하며 오늘 재판에서 시아버님께서 무죄판결을 받게되어 다행이고 기쁘다고 했습니다. 농사를 짓던 17세 안타깝게 잡혀간 시아버지 홍두식님이 우리 집안의 훌륭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자손에게 잘 전하겠다고 소감을 마무리했습니다.
희생자 강창식님의 아들 강00씨는 마이크를 들었으나 목이 메여 발언을 시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어릴 적 주위에서 4·3 희생자들을 폭도라고 손가락질하던 상황에서 지금은 이렇게 맘껏 4·3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 반갑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주신 분들께 고맙다며, 최근 부친과 유사한 경험을 한 피해자의 수기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떠올라 목이메인다고 했습니다. 그 수기에는 1949년 2월 잡혀 와서 제주경찰서에서 고문당한 내용, 군법회의를 거쳐 형무소로 가게 된 내용, 제주항에서 목포항으로 가는 배안에서 이어진 고통들에 대한 수기를 보면서 우리 아버지도 이런 고생을 하면서 돌아가셨겠구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신(귀신)'이 있어 이 상황을 볼 수 있다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발언을 마쳤습니다.
희생자 양영배님의 동생 양00씨는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형이 돌아가셔서 솔직히 형의 얼굴을 모른다고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식구들을 보살폈으나 제주4·3 이후 폭도가족으로 몰려 집안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18세로 서귀중학교에 다니는 든든한 형이 잡혀갔고, 아버지는 아들을 데려오려다 경찰에 매 맞아 16년 동안 병석에 있다가 본인이 9세가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이후 학교에서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할 때마다 고민이 많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형이 형무소에서 돌아가신 것 같은데,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며, 당시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답답한 심정을 밝혔습니다.
"살아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늘의 무죄판결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지 것 형이 무슨 죄로 잡혀갔는지 몰랐다며, 오늘 죄명을 들으니 내란죄라고 했는데 18세에 과연 범할 수 있을까? 경찰이나 군인이 건수를 올리기 위한 무차별로 잡아들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 시대에 도민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뭔지 얼마나 알고 했는지 되짚어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교육을 통해 단순히 제주4·3이 발생했다는 사실만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이나 배경을 넓게 알려주는 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도 했습니다.
동생 양씨가 바라는 것은 형님이 돌아가신 날짜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0년 전에 인연이 있던 검사장에게도 형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6.25라는 혼란으로 인해 형무소에서 사망통지서를 못 받은 것 같다며 당시 정부가 제주4·3을 민감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고 합니다. 동생분도 관심을 가졌으나 정부와의 싸움이 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아 적극적으로 더 알아보지 못했다며, 지금도 피해자들의 사망 시기를 모르는 분이 많으니 정부차원에서 더 확인해주기를 요청하며 발언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장부장판사는 양00씨의 발언을 언급하며, 제주4·3은 현재 진행형이며, 지난 3년 동안 4·3 관련 재판을 하면서 느낀바 중에 하나가 그동안 많은 분들이 노력을 해주셨다며 후대까지 이런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제주4·3의 현재 진행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는 기자, 제주4·3을 기록하고 연구해온 '제주4·3연구소' , 제주4·3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활동하는 '제주다크투어' 에 발언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제주의 소리 이동건 기자는 앞으로 제주의 젊은 기자들이 계속 4·3을 공부하고 보도해서 전승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유족분들께서 기자들에게 잘 얘기해 주시면 열심히 기사를 쓰겠다"라고 발언을 마쳤습니다. (사)제주4·3연구소 오화선 실장은 정말 많은 분들이 한 방향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에 오늘 법정에서 이런 상황까지 온 것에 대해 기쁘다며, 애쓰신 유족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최근 필리핀을 보면서 이런 비극이 얼마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에 절감하며, 앞으로 남은 과정을 잘 진행해서 우리는 이런 일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는 주변에서 언제까지 4·3 이야기 할 것이냐는 말도 하지만, 4·3으로 인해 잘못 호적의 정정 등 앞으로 남은 과정들이 많다며,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보상은 4·3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의 당연한 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명예회복을 위한 일들을 같이 한다면 좀 더 많은 분들이 살아계실 때 피해회복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창수 부장판사는 재판을 마치며, 유족들에게 말합니다.
"희생자 유족 여러분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돕기 위해 함께하는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ps. 재판 중에 장찬수 부장판사는 제민일보가 쓴 『4·3은 말한다』를 읽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20년 전에 쓰인 내용이다 보니 유족이나 생존한 분들이 많이 계셔서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고 설명하며, "참혹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라고 묵직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꼭 읽어보길 강권하며, 이 책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사)제주다크투어도 『4·3은 말한다』 강독모임 2기를 꾸려 1권부터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판사의 이런 발언이 매우 공감가고 반가웠습니다. 총 5권, 출판되지 않은 것 까지 6권의 분량이 부담스럽지만 기회가 된다면 『4·3은 말한다』를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