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말] 지난 9월 14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제주4·3 행방불명 수형인 재심 청구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날 재판에는 고령의 재심 청구인 열 분이 참석하셨고 이 중 세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하셨습니다. 재심 청구 재판이 시작된 이래 청구인인 유족들의 말을 들어볼 수 있는 첫 번째 자리였습니다. 시민방청단 결성 이래 첫 재판 방청이기도 합니다. 아래 글은 시민방청단에 참여한 성미산학교 10학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직접 재판을 방청하고 쓴 후기입니다. 후기 작성자는 이름 또는 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울면
‘무섭다’
처음 법정에 들어설 때 했던 생각이었습니다. 뭔가 떠들면 안 될 것 같고, 뭔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엄숙함. 판사가 들어올 때는 모두 일어나야 하고, 판사의 허락 없이는 말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 무섭다고 느껴졌습니다.
먼저 현경아 어르신이 증언하셨습니다. 어르신은 남편을 잃으신 과정을 담담히 말씀하시다가, 증언 말미에 변호사님께서 하신 ‘재판장께 하고 싶은 말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에 ‘남편의 몸을 찾아 봉분만 만들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4·3 당시 아버지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희생되신 김을생 어르신이 증언하셨습니다. 군인들이 집을 불태우고 군홧발로 어머니를 걷어차는 상황에서도 살려달라고 빌어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시며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이상하 어르신이 증언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누나와 형수, 행방불명된 형과 조카들까지 국가에게 학살당한 이상하 어르신은 나라가 4대를 죽였다며 분통을 터트리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필문 어르신이 증언하셨습니다. 김필문 어르신은 김을생 어르신의 동생으로, 어르신의 아버지는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되셨습니다. 기록상 15년형을 선고받았다고-이마저도 부당한 군사재판을 통한 것이었지만-되어 있는 사람을 행방불명자로 만들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분의 공통적인 태도는 항상 판사에게 극존칭을 사용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국가’와 ‘제복’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복종해야 할 대상으로 무의식중에 남아 기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 어르신들께는 어쩌면 당연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만 살아온 저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마음가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어르신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노랭
재판이 시작되자 어르신들이 4·3 당시의 상황이나 감정을 이야기하셨다. 우리는 제일 뒤에 서 있었는데 앞에 앉아계신 어르신들이 증언을 듣고 “힘들었겠네”, “맞아. 그랬지”하며 하시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 그분들도 4·3을 겪으셨겠지. 어제 4·3평화공원에 있던 행방불명인 표석을 보고 한 분 한 분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비석에 이름 적힌 분들이 저분들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억에 남은 것 같다.
승현
드라마, 영화 속에서만 보던 재판을 내가 실제로 본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드라마 속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장 5년 전 기억도 흐릿한데 몇십 년 전 일을 기억하고 계셨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형식적인 생각밖에 나지 않아서 살짝 화가 난다. 내가 집중을 못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 이런 형식적인 생각밖에 나지 않는 걸까. 짜증이 났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다리가 아파져 와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자세히 듣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아! 나랑 산이가 떠들지도 않았는데 우리 보고 조용히 하라고 해서 매우 억울했다.
현빈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는 증언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살해한 죄인에게, 자신의 삶을 앗아가는 순간까지도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국가란 뭔지, 국가에게 국민이란 뭔지 질문을 남기게 됩니다. 법정 안의 엄숙한 분위기처럼 법은 융통성 없는 깍쟁이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정의롭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공정을 위해선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겠죠.
이번 재판의 쟁점인 실종자분들의 죽음을 증명하는 일은 앞서 말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 하나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의인가요?
산
내 생 첫 번째 재판정이었다. 나는 판사가 망치만 치는 줄 알았는데 판사가 진행을 해서 깜짝 놀랐다. 전날 다크투어로 다리가 무지 아팠는데 계속 서 있어야 해서 집중을 잘못했다.
잘 듣고 귀에 담아가려 했는데 집중을 못 해 아쉽다. 그래도 평화공원에 가서 위패 보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듣는 것보다 실제로 경험하신 걸 듣는 게 더 많이 와닿아서 더 좋았다. 마스크를 써서 그런지 떠들지 않았는데 조용히 하라고 하셔서 너무 억울했다.
채원
법원에 처음 가봤는데 법원이 세트장 같았다. 뒤에 계속 서 있어서 힘들었다. 처음에 판사분이 코로나 때문에 나가도 된다고 하시는데 뭐지? 싶었다. 차례대로 재심 청구하신 유족분들이 4·3 때 이야기하실 때마다 방청석에 계신 어르신분들도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보고 꼭 억울함을 푸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분들이 72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을 간직하시고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을지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호영
재판을 태어나서 처음 보게 되었다. 그리고 4·3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이 증언하면서 많이 우셨을 때 안타까웠고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재판을 보다가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나오게 됐습니다. 증언하는 사람이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 걸 보면서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4·3 사건이 72년 전인 1948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모든 걸 기억하고 계셔서 당사자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재판을 시작할 때 재판장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고 왜 왔는지 엄격하게 물어보셔서 어이가 없었고 무서웠습니다
똘추
재판을 직접 방청한 건 처음이었다. 재판장이 엄숙하고 룰이 많은 곳이란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까 그 룰들이 좀 웃겼다. 없어도 될 법한 룰들인데 없애면 자신들의 권위도 없어질까 봐 애써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판사의 자리가 높은 것도 그랬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있으면 권위적이지 않았던 사람도 권위적으로 변할 것 같았다.
사실 재판 중에는 제주도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느라 그래서인지 그 내용에는 집중을 제대로 못 했다. 그래서 재판이 끝난 후에도 내가 뭘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잘 모르겠어서 짜증이 좀 났다. 그래도 증언하신 세 분이 모두 말씀하시다 우시는 걸 보면서 몇십 년이 지나고 몇십 번을 말했지만, 또 말할 때마다 울게 되는 일이 있다는 건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은 하게 됐던 것 같다.
은결
재판장이 처음에 거리두기 얘기를 하며 나가도 된다는 얘기를 했을 때 뭔가 싶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제주의 살아있는 역사를 본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 시작 전에는 마치 4·3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우리는 나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4·3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재판장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판사 옷을 입고 태어난 건 당연히 아니니까, 그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다.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증언하시다 감정이 격해진 분에게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평소 4·3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복순
항상 4·3에 대해 글이나 영상으로만 접하다 실제로 4·3을 겪으신 분들의 목소리로 들으니 새로웠다. 옛날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실제로 있던 일이라는 느낌이 잘 안 들었는데 법원에 오신 어르신들과 증언하신 분들을 뵈니 이게 진짜 있던 일이구나 하고 확 느껴졌다.
늑대
제주지방법원 201호 복도에 들어서니 어르신들이 가득 앉아 계셨다. 제주에 오기 전 다큐멘터리 <희춘>에서 본 생존 수형인 재판 때와 꼭 같아 보였다. 앳된 무리가 모이자 조금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앉아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으셨을 일들이 떠올라 기록을 위한 사진도 영상을 위한 움직임도 조심스러웠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5·18이 먼 그날의 과거에서 오늘의 일로 느껴졌던 1학기의 낯섦처럼, 현경아 어르신의 제발 시체라도 찾아 봉분을 만드는 것밖에는 원이 없다는 깊은 울음에 처음으로 4·3이 오늘에도 생생한 고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늘상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다르듯이.
그렇게 많은 이들을, 3만여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가둘 때는 참 쉬웠던 권력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데는 꿈쩍도 하지 않는 돌처럼 느껴진다. 진상규명을 위한 법이 만들어지고, 대통령이 사과하고, 입 밖에 낼 수 있고, 재심을 청구할 수 있어 이제라도 달라졌다 해도, 불법 군사재판이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그 자체를 판단해 관련 피해자 모두에게 재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없어서 혈족이 청구하고, 그 당사자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그 가족이 증명해야 하는 이 법적 절차 자체가 불의하다고 생각되었다.
총으로 살해당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염을 위해 모인 일곱 식구들이 밥을 먹다 끌려 나와 담벼락에서 모두 죽임을 당한 이상하 할아버지. 총알이 피해가 혼자 살아남아 지금까지 살아온 열세 살 소년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를 이렇게 기억했다.
“대한민국 만세”
이상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총살되기 전 외쳤다는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던 걸까. 아버지가 마음으로 외쳤던, 품에 안은 나라는 이런 나라였을까.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만들고자 했던 그런 나라.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바라고 외쳤던 것은 아닐까.
아직도 이런 국가의 이상이 멀기만 한 이 시대에, 세월호의, 용산참사의, 쌍용자동차의, 제주 제2공항의, 김용균의, 김지은의 이 시대에 4·3을 바로 알고 기억하며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만들고 살아가야 할 학생과 청년들을 눈앞에 두고 이 재판에 ‘왜 왔느냐, 몇 학년이냐, 4·3과 무슨 특별한 상관이 있어 왔느냐’를 물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나가달라는 의미의 완곡한 요청을 한 재판관이 같은 이들에게 ‘여러분은 4·3의, 제주의 슬픈 살아있는 역사를 목도한 젊은이들’이라는 말로 마무리한 역설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그가 내릴 판결과 그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어느 만큼 떨어져 있고 어느 만큼 투명할까.
당사자도 증명할 가족도 없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진실을 밝히려면, 그 수많은 죽음 아래 권력을 유지하고 이익을 취해 대대손손 약자들을 착취해온 힘을 바로 보는 시작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불의함을 인정하는 그 자체로서 기존 4·3 특별법의 개정은 꼭, 그리고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자들이 고통과 함께 일궈온 아름다운 제주에서 오늘에도 반복되는 거대 권력과 자본의 논리는 반드시 멈춰져야 한다. 이 땅 제주 섬의, 오늘의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우리는, 나는 무엇이든 해 나가야 한다. 자위뿐인 말과 몸짓이 되지 않지 않으면서 말이다.
지미
하루 전 제주다크투어의 첫발 딛기 투어를 다녀왔다. 가장 처음 마주한 건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의 수많은 이름이었다. 4·3을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사람이 아니라 글자들로 보였다. 도시에서 너무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감각을 매 순간 접하며 살아서일까, 너무 많은 이름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진짜 많구나 희생자가 정말 많구나. 나에게도 글자만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정동하지 않았을까. 피해를 감각하지 못했을까.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하루를 되돌아보며 그런 질문을 했다. 연락할 수단이 없는, 조용한 마을에 이유 없이 들리는 총소리는 어떤 걸까.
그리고 다음 날 4·3 행방불명 수형인 재심 청구 재판에 참여했다. 어제 떠다닌 숱한 이름들보다 오늘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 훨씬 살아있는 역사로 다가왔다. 확실히,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라고 느껴졌다. 눈앞에서, 같은 공간에서 온몸으로 말씀하시는 유가족분들의 말씀과 그 목소리를 남기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또한, 열 분의 청구인 뒤에 다른 (아마 청구인과 유가족)분들이 서른 분 정도 앉아계셨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들은 건 세 분의, 세 가족의 이야기였는데도 개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건으로 들리지 않았다. 제주에 오기 전 좋은 글도, 충격적인 영상도 봤지만 나에게 4·3은 이제 다른 어떤 글귀보다 이 증언의 순간을 떠올릴 것 같다.
재판 동안 법의 얼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 많았다. 어려 보이는 사람들에게 학생이냐고, 무슨 직접적인 관련으로 왔냐고 쉽게 묻는 판사, 증인 방청석 변호인과 검사석에 비해 너무 높아 보이는 판사석, 대리인의 재심 청구를 위해 피해 사실만큼 당사자의 사망 여부가 중요한 형사소송법. 올해 힘쓴 기후변화 운동에서도 했던, 정책변화의 실효성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법으로 정책으로 우리가 원하는 정의를 모두 담아낼 수 없지만 그렇기에 법과 정책은 현실에서의 충돌 속에서 깨지고 바뀌고 깨지고 변화해가야 한다. 미리, 이미, 완벽한 법이란 있을 수 없겠다 싶은 거다. (물론 시대의 요구를 적절히 빠르게 반영하는 것이 당연히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특별법을 개정하면 적어도 유가족분들은, 청구인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결과에 매달리고 시간과 힘을 할애하며 기다리는 대신, 적어도 빨갱이라는 낙인 없이 여생을 평안히 사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 고민은 이것이다. 이를 경험하는 제3자, 국민들은 그럼 무엇이 달라질까. 특별법이 개정된 사회에서 산다는 것. 72년이 지난 오늘에도 국가폭력의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낙인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이뤄진다는 것. 4·3에서 나는 어디에 누구로 무엇을 위해 있는가? 적어도 재판이 이뤄지는 지금 이 시간에 나, 우리는 견제자였다. 존재만으로도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제주4·3’을 깔끔히 정리된 한 문장이 아닌 몸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청구인의, 행방불명 수형인의 가족이자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으로 기억할 거라는 것. 나는 이 사회 속 그 위치에서 4·3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까.
* 제주4.3 재심재판 시민방청단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계속 모집합니다. 방청을 희망하시는 분들은 다음 링크에서 신청해 주세요 >> bit.ly/재심시민방청단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