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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하면 살려주겠다.

마을회의에 참석하라.

나무를 하러 나오라.

해안마을로 이주하라.


영문도 모른 채 불법적으로 끌려간 제주도민의 사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내용이다.

그들은 당시 군법회의에서 구형받은 '내란죄', '간첩죄', '이적죄'를 지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오히려 경찰이나 군인들의 요구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연행되어 구금되었고, 죽임을 당했다.

직권재심 재판이 진행된 엄숙한 법정에서 검사는 제주4·3 기간 동안 불법적으로 진행된 군사재판의 역사를 정리하며, 20명 4·3수형인들의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으므로 무죄를 선고할 것을 판사에게 요청했다. 단 10분 만에 끝나 검사 측의 발언은 지난 70여년 영문도 모른채 옥고를 치루고 학살 된 이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담아내기에 너무 짧다.


제주4·3 당시 군사재판(군법회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해방 이후,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부는 여전히 통일된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제주도민을 통제하기 위해 1948년 10월 17일,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주로 중산간 마을이 해당)에 통금을 명하는 포고령을 선포한다. 이어서 11월 1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 당시 우리나라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근거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계엄평 선포기간 동안인 1948년 12월에 1차 군법재판이 진행되었으며, 당시 871명의 도민에게 구 형법 제77조 내란죄를 선고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정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듬해인 1949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대대적인 3차 군법재판을 진행한다. 계엄령이 종료되었음에도 국방경비법 제32조 간접최, 제33조 이적죄를 제주도민 1,659명에게 적용하였다.


제주4·3 당시 군사재판은 명백한 불법이며, 국가 폭력

이승만 정부가 선포한 계엄령 자체가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이른 근거로 한 모든 공무와 공권력 집행 자체가 불법이었다. 또한 2차례의 집중 군사재판도 당시 혐의를 입증한 물증 없이 도민을 연행, 구금, 고문, 학살한 전반의 과정 전체가 불법이었다. 특히, 당시 군법회의에 의해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된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로 불순분자 처리 방침에 따라 학살되었고, 일부는 행방불명되어 아직까지 유족은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직권재심 재판 법정에서

검사 측이 4·3수형인 20명 모두에게 무죄 구형을 한 후, 수형인 측 변호인은 고인이 되어 무죄판결을 앞둔 20명 각자 어떤 상황에서 국사재판을 받게 되었는지 빠짐없이 읊어갔다. 법정에 앉은 수형인의 유족들과 방청하는 시민들 모두, 한 단락씩 언급된 각 수형인들의 억울한 당시의 상황을 숨죽여 경청했다.

판사는 20명의 수형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제주의 참혹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최소한이라도 알아야 한다며 짧은 소회를 밝혔다.

이후 2명의 수형인 유족이 판사의 진행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노인이 된 수형인의 아들은 부친이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본인도 일본에서 출생했으며 가족이 일본에서 자리 잡고 살았다고 했다. 해방이 되니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만 가지고 아무것도 없이 제주로 와 겨우 초가집을 짓고 살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끌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모친께서 105세로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는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아쉬움과 아픔을 표하셨다.

#본인이 국민학교 4학년 때 임시수용소에 잡혀간 부친을 면회간 기억이 난다며 다른 유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아버지에 말에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와 모친에게 전하고 하루, 이틀 세월이 흘렀고, 본인은 이제 87세의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지금도 맨발로 나갈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분들께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다.

고인이 되어버린 수형인들의 유족에게 74년이 지난 오늘 무죄판결을 받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죽은 가족이 돌아올 수도 없고, 폭도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 받던 유족들의 삶도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 법정에 참석한 유족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다. 죄없는 자신의 가족을 억울하게 학살한 국가이면서 70년 후 죄가 없음을 인정하고 명예회복의 기회를 준 것도 국가고 정부다. 재심재판이 열린다는 것이 유족에게는 기쁜 일이기도 하겠지만, 죄 없는 나의 가족을 처벌한 국가의 폭력을 다시 복기해야 하는 잔인한 과정인 것 같다.


더 이상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국민은 없어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독립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간 냉전, 중국의 개라는 외부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국전쟁을 거쳐 70년 가까이 분단되어 있다. 준비 없이 수립된 남한 정부는 불안정한 체제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여러 국가 폭력을 자행했다. 그 중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 제주4·3이다. 70년이 지난 오늘 세번 째로 열린 직권재심 재판으로 제주4·3 희생자 및 유족이 더디게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의 배보상을 통해 피해에 대한 반성과 위로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7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남아있다.

지난 70년 동안 4·19혁명, 5·18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까지 우리는 국민의 권리가 국가로부터 훼손되지 않고,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 충실하도록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지속하려면 우리는 과거를 잘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며, 잊지 않아야 한다. 그 시작에 제주4·3이 있다.


*계엄령: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입헌체제의 부분적·일시적 정지를 취할 수 있는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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