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젠더, 평화의 눈으로 본 제주4·3> 기획강좌에 참여한 고권일 님이 강의를 듣고 후기를 보내오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근대국가의 근간은 인권보장이다. 정부에게 통치권한을 부여한 것이 국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인권의 무게는 국가의 무게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인권의식이다. 이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정부는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이란 개념을 성립시켰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질서, 불완전한 평등이 발견되거나 통치권력의 권한남용에 의해 피해가 발생할 때 국민의 저항권을 보장하여 보다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여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4·3은 근대국가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한 국가적 폭력이었다.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그 전개과정은 사건사고에 국한하지 않고 내전에 가깝게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남, 북에 각각 미국과 소련의 분할통치가 시작되며 남한의 경우, 극한의 혼란 속에 인민의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정부수립 움직임은 인민들을 자극하였고 이는 1947년 전국적인 3·1 절 기념행사로 표면화되었다. 제주의 경우 이를 제지하던 경찰이 탄 말에 의해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일이 일어나자, 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기를 발포해 6명이 크게 다치고,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경찰은 문제해결 대신 3·1 만세운동의 주동자 색출과 대규모 연행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서 민관총파업으로 사태해결을 요구했으나, 2,500여명에 달하는 사람을 수감한 것으로 모자라 고문치사사건까지 발생하자 저항을 넘어 무장항쟁으로 분출된 사건이 바로 제주 4·3이다. 이 시점까지도 4·3은 사건 수준이었고 대규모 유혈을 동반하지 않는 평화적 수습이 이루어질 개연성이 농후했다. 1948년 4월 28일 열린 김익렬 연대장과의 평화협정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선포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4·3 무장대를 국가체제를 부정하는 국가전복세력으로 규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평화적 해결 방법을 버리고 제주지역을 강압적 점령을 통해 지배해야 할 적지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소개령과 계엄령을 선포, 이른바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여 해안선 기준 5km 이상 중산간에 위치한 80여개 마을을 불태우며 거주하는 제주도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제주도를 군함으로 포위하여 제주도를 빠져나가는 어선이 없는지 감시하였고 해안에 위치한 마을들에서는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제대로 된 군사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4·3은 한국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전체 도민 약 30만 명의 1/10에 이르는 3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 수는 인권의 문제를 아득히 넘어서는 섬멸전 개념의 전쟁보다도 가혹한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은 공포정치를 넘어서서 증오를 재생산하는 장치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한다. 토벌대가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하자 무장대의 증오는 하늘을 찔렀다. 일가친척을 모두 잃은 무장대는 군경과 밀고자와 그 가족들, 토벌대와 조금이라도 연결이 있다고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죽였다. 토벌대와 무장대가 민간인들을 번갈아가며 죽이는 증오의 폭주시대이기도 했다. 전쟁 상황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인간의 수많은 감정 가운데 극도의 증오와 공포만 남는 이상한 상황이라 악마와 같은 행동이 나온다고도 한다. 하지만 전쟁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있어왔다. 국제협약인 제네바 협약(1864~1949)이 그것인데, 민간인 보호에 대한 내용은 1949년이 되어서야 제정된 4차 협약에 포함되어 있다. 1차 제네바 협약은 군인들이 포로로 잡혔을 때의 처우에 대한 협약에 불과했다. 즉, 국가 간 전쟁에 가장 필수적으로 필요한 자원은 군수물자와 군대를 구성할 군인이었기에 제네바협약은 인권보호협약이기 앞서 자원보호의 개념이 앞서는 협약이었다. 그러다 점차 인류의 도덕성이 반영된 협약으로 질적 성장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계인권선언이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주에 있어서 정부에 반기를 든 세력은 포용하여야 할 국민이라는 개념보다 도려내야 할 썩은 부위처럼 인식되기가 쉬울 수밖에 없었고,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제3세계 내전들은 끔찍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제주 4·3에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발생 했을 때 이를 방지 할 수 있는 국제적 협약과 인권선언은 아직 제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전에 제정되었다 하더라도 미군정이나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지켰을지 의문으로 남는다. 제네바 협약은 국가 간의 분쟁에 적용되는 협약이고 내전 상황에서는 적용이 쉽지 않았다. 또한 국제사회의 개입은 내정간섭이라며 해당국가 정부의 거부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동서 이데올로기 갈등이 빠르게 심화되어가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렇듯 4·3은 정부수립과 동시에 끔찍한 대량학살이 진행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3 학살은 아무리 시간이 경과한다 해도 결코 용인할 수도, 해선 안 되는 만행이다. 물론 증오와 공포가 짓누르는 상황 아래서 발생되었다 하더라도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역시 이러한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비록 토벌대의 학살에 비해 1/10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그 학살행위로 인하여 도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중산간에서 내려온 민간인들조차 폭도로 취급되기도 했다.다. 그러나 그 증오와 공포 상황은 대한민국 정부가 4·3을 '내전'이라는 전쟁상황으로 취급하여 '토벌'과 '초토화' 작전을 펼친 결과이기에 원인제공자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응당 옳다. 그리고 제주도민의 약 1/10에 해당하는 거대한 인명피해는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행위이기에 철저한 진상규명과 반성과 책임자 처벌을 통해 미래를 열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성격을 담아낼 정명이 필요하며 교과서에 상술하여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
4·3의 여성인권 상황은 남성에 비해 나을 것이 없었다. 단순하게 희생자 수로 비교하면 남성 희생자가 여성 희생자에 비해 3배 가량 높으나, 여성들은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강간과 강제결혼, 출산, 생계, 강제노역 등 지옥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어쩌면 목숨을 내놓는 쪽이 훨씬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척박하고도 처절한 조건 속에서도 억척같이 살아내고 자식을 품어 길러낸 여성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주가 있다. 그 강인한 정신력과 삶에 최고의 경의와 감사를 전한다. 하지만 그 분들이 여권을 신장시키는 일에는 오히려 역행하는 부분들이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4·3과 한국전쟁 이후의 여성들은 경제활동과 생활 전반에 남성보다 훨씬 큰 기여를 하면서도 권리는 찾지 못했다. 족은각시, 말젯각시 등 첩의 삶을 살며 남존여비의 가장 큰 희생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인구 비율이 높은 조건에 묻혀 남아선호 사상을 더욱 높이고 신봉하는 삶을 살아 결과적으로 남존여비 사상을 확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직까지도 제주지역의 여성인권은 그리 평등하지 못하다. 가정에서의 모든 결정권은 대부분 남편에게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도 결혼 풍습에서 함을 오히려 처가집에 승인을 받아 모신다거나, 이불값, 옷값 등을 신랑집에서 처가집에 내준다거나, 처가집 살림을 책임지거나, 처가의 대소사에 일정 부분을 책임지며 함께 하는 풍습들은 육지에 비해 생소하며 여권이 육지에 비해 나은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전후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을 첩으로 데려오는 조건으로 행해지며 풍습화 된 것에 불과하다.
4·3 당시의 젊은 여성들은 사회주의적 사상과 민주주의적 정치를 학습하고 활동력이 왕성하여 남성보다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4·3은 그런 의미에서 평등이 싹튼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오랜 억압에서의 해방은 단순히 국가 간의 지배지형의 변화만이 아닌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불평등인 계급과 성별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했다. 오히려 이후 70여 년간의 우리는 삶의 해방 측면에서 4·3 당시 보다 후퇴한 부분이 많다. 자본주의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구분하여 역행할 수 없는 계급을 낳았으며, 여성의 이미지는 상품화되어 소비할 대상으로 전락한 부분이 크다. 이제 우리에게 4·3은 인권과 인간해방의 차원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참다운 삶, 나다운 삶,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위한 삶을 4·3을 통해 배우고 일으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