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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강건 부장판사가 4·3 재심재판을 처음으로 진행하는 날이었다. 강건 부장판사는 제주출신으로 4·3 재심재판에 각별한 관심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가 전임판사와 같을 지는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미리 예단하기는 어려웠다.

오전 10시 30분에 4명의 피고인에 대한 일반재판 특별재심이 시작되었다. 변호인은 "모든 피고인이 사망한 상황에서 직접 진술할 수는 없으나, 의 유족은 일관되게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검찰측은 공소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피고인 망 김일현 님의 손자 김00님의 배우자는 피고인이 잡혀갈 당시를 목격한 할머니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피고인이 왜 잡혀갔는지 물었더니, 피고인은 당시 약간 모자라 오롯이 어머니를 도와 밭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말을 잘 하거나 똑똑하지도 않았는데, 검사는 그런 사람을 정부의 일을 방해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놀랐다고 했다. 4·3 당시 청년들에게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산으로 올라가라는 얘기를 해서 피고인도 함께 이유도 모른 채 한으로 올라갔다고 증언했다.

피고인 망 박정생 님의 아들 박00님은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버님에 대한 광주지방법원의 판결문을 읽어보며, 어떻게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느다. 판결문의 내용에 동의 어렵고, 국가에 대해 원망스러울 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생전에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다른 사람들과 붙잡혀 가 죄를 뒤집어 쒸어 억울하게 형을 살고 돌아와 50대에 일찍 돌아가셨다. 무죄로 재심 판결을 내린다면 자식으로서 여한이 없겠다. 늦게나마 억울한 누명을 벗고 자실들, 어머니의 명예회복을 받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란다."라고 증언했다.

피고인 망 강기옥 님의 아들 강00님은 "제일 억울한 게, 우리 아버지가 죄 없이 내려갔는데, 붙잡아 갔다. 이후에 학교를 못 다니게 돼서 힘들었다. 정말 억울하다. 우리 아버지는 죄 없이 그냥 잡혀갔다."고 증언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 10분 부터는 30명의 피고인이 포함된 군사재판 특별재심 재판이 이어졌다. 강건 판사는 이날 참석한 피고인의 유족들에게 모두 증언의 기회를 제공했다.

피고인 망 김병민 의 아들 김00은 "저희 아버지는 4·3사건이 난 다음에, 그 당시에는 폐결핵을 가장 무섭게 생각하니까 방에만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오든, 밑에서오든 아버지 폐병 환자라 방에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호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낮에 모이라고 해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그 곳에서 형수가 살아있다는데, 방에만 있었던 아버지가 뛰쳐 나가서 형수님을 밤에 모시고 집에 돌아오셨다. 형수를 치료하기 위해 근처 동물병원 원장님을 찾아가야 했다. 그분한테 형수님 모셔다 놓고, 다음 날 밤에는 환자를 덮을 이불을 갔고 가서 드리고 내려오다가 총에 맞고 잡혔다. 폭도로 오인되어 주정공장에 있다가 대전형무소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중에 골령골에서 희생되었다고 들었다. 단 두 번 집 나갔다가 큰어머니를 위해서 움직인 것인 폭도로 오인 받은 것이 너무 억울했다. 어머니는 25세에 과부가 되어 남매를 키우다 3년 전에 돌아가셨다."라고 증언했다.

망 현덕홍 님의 조카 현00님은 증언에서 "피고인은 큰아버지다. 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큰아버지 묘에 매년 찾아가서 꽃도 드리고 제사 지내겠다고 말씀드렸었다. 재판이 조금만 일찍 있었으면 아버님이 한없이 돌아가셨을텐데, 너무 아쉽다. 지금이라도 이런 기회가 있어서 감사드린다. 무죄판결을 꼭 내려달라. 돌아오는 4·3에 큰아버지,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영전에 무죄판결문을 바치고 싶다. 어렵겠지만 그날까지 판결해달라."라고 호소했다.

망 이정우 님의 며느리 김00는 "다 들은 얘긴데, 시아버님이 밭에서 일하다가 끌려갔다. 남편은 그 당시에 생일도 모르고, 나이도 몰랐다. 지금 1949년으로 호적이 되어있지만. 너무 억울하다. 형제도 없다. 학교도 못가고, 아무것도 모른다. 사진도 하나 없다.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아버지 사진도 없다. 손가락, 발가락 하나라도 만지고 싶다. 지금 남판은 아파서 말도 못한다. 울기만 한다. 자기 생일도 모른다. 호적은 49년이고, 동네사람들은 47년생이라고 한다. 대정읍 신평리가 본적인데, 학교도 맨발로 다니다가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다니지 못했다. 시아버님은 생일날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 시아버지가 형무소에 갔다고 하니, 형무소로 찾아갔더니 너무 추우니까 저고리 하나 떠다 달라고 하더라. 우리 시어머니가 저고리를 한 달 더 걸려 따서 가니 아무것도 없더라. 그 길로 소식이 끊겼다. 억울한 것이 많다."라고 증언했다.

망 김청자 님의 조카 김00님은 "아버지가 동생이다. 제가 어릴적에 저희도 고모가 계신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께 물어봤었는데, 아버지도 그렇고, 저희 할머니도 4·3사건때 끌려가서 행방불명 되었다는 내용만 알고 있었다. 어디로, 어떻게, 어떤 형무소에 가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조차 모르고 사셨다. 이번 재판 전에 고모님께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셨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서 행방불명 되었다고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의식 없이 입원해 계신다. 그동안 이런 내용 조차 모르고 사셨다는 것이... 이번에 가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다."라고 밝혔다.

망 고중권 님의 조카 현00님은 "어머니께서 생전에 우리에게 들여준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어머니의 동생은 1949년 봄에 무장대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 있었는데, 무장대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마산형무소에서 수감을 했고, 옥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적에 외삼춘이 살아계셨으면 한인물이었다며, 똑똑하고 훌륭했었는데, 너무 억울하게 죽게 했다는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외삼춘의 무죄선고로, 4·3의 억울함을 풀게 되면 유족으로서 기쁘고, 하늘에 계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영전에 이 기쁨을 고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망 김만중 님의 조카사위 강00님은 "장인네 4형제가 한꺼번에 다 갔다. 주변 백사장으로 18세 이상 모이지 않으면 다 죽인다고 해서 다들 갔는데, 다 총살했다더라. 남은 사람이 장인이라 도망을 갔다. 살기위해서 도망갔는데, 다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학교도 전혀 못다녔다. 지금도 겨우 자신의 이름만 쓸 줄 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으면 이런 생활을 안했을 텐데 너무 억울하다고 하더라. 지금도 날마다 운다. 오늘 목이 메여서 못오겠다고 해서 대신 왔다."라고 증언했다.

이날 피고인의 유족 증언을 들은 판사는 첫 무죄선고를 앞두고, 판결문 작성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4월 4일로 선고일을 정했다. 그리고 4월 4일 모든 피고인은 무죄선고를 받았다. 강 판사는 본인도 제주 출신임을 밝히며, 증언 중에 사투리를 편하게 쓰도록 안내하는 등 재판 내내 유족들에게 편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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