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젠더, 평화의 눈으로 본 제주4·3> 기획강좌에 참여한 임지호 님이 강의를 듣고 후기를 보내오셨습니다. 홍춘호 할머니와 함께 한 강좌 후기입니다.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
대학 진학을 위해 육지로 올라갔었다. 그 곳에서 나를 가장 먼저 설명해주는 단어는 ‘제주도 출신’이었다. 어딜 가나 사투리를 써보라는 요청과 현지인들만 가는 맛집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저도 집에만 있어서 제주도 잘 모르거든요?’ 발끈해서 대답하면 또 그것대로 놀림을 받았다. 육지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다가 실패했다. 다시 제주에 돌아왔다. 꿈을 쫒는 건 너무 막연했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동네 산책을 했다.
어느 날 문득 운동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운동장 한 구석. 철봉과 그네 미끄럼틀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四·三事件犧牲者慰靈塔’4.3사건희생자위령탑. 거기에 적힌 이름을 읽어보았다. 우리 동네에서 140여명의 사람이 죽었다. 아득했다. 어쩌면 미래의 특정한 장소를 꿈꾸는 것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발 딛고 서 있는 땅에 대해 먼저 알아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제주다크투어>에서 기획한 「인권·젠더·평화의 눈으로 본 제주 4.3」강의를 신청했다. 10월 15일. 강의 7주차. 홍춘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무등이왓’이라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살의 시기에 ‘큰넓궤’라는 동굴에서 40여일 정도 지냈다. 할머니는 아주 구체적으로 그 시절을 기억하고 계셨다. 큰넓궤는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서 어린아이도 무릎을 꿇고 들어가야 했다. 입구를 지나면 넓은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숨어 지냈다. 굴에서 지낸 사람들은 120여 명이나 되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굴속에서만 생활하고, 젊은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할머니는 당시 노인들이 하루 종일 짚신 새끼를 꼬고 있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셨다. 노인들이 꼰 짚신을 젊은이들이 동굴 밖에서 신고 다녔다. 할머니의 아버지도 동굴 밖의 상황을 살펴보는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밖의 상황을 매일 전해주었다. 오늘은 누구네 가족이 몇 명 죽었다… 불씨 3개로 서로의 형태만 겨우 알아보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아버지를 붙잡고 ‘밤이라도 좋으니 하늘을 보고 싶다고 울며불며’ 사정했다.
할머니의 여든 인생을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없지만, 나는 저 한 마디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일상적인 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2019년을 사는 20대 여성인 내가 상상할 수 있을까.
월세가 10만원 더 싸서,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으로 이사했다던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감히 할머니와 친구를 연결해본다. 이들의 상실이 발생한 자리를 사유함으로서, 건강한 공동체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