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화) 오전 10시 30분,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죄 등으로 기소됐던 고(故) 김두만님 등 제주4·3 수형인희생자 30명에 대한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재판으로 4·3 직권재심으로 무죄 선고를 받은 수형인은 모두 430명이 되었습니다.
망 김희교님의 아들 김00님은 4·3수형인들에 대한 연좌제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뻔한 경험이 있습니다. 김명훈님은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보낸 엽서로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계시다는것을 알게 되었는데, 6.25 전쟁 이후 실종되셨습니다. 1968년 교육대학을 졸업했는데 1월 초에 파출소에서 순경이 와서 신원조회를 했습니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가서 행방불명되었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이 3일 뒤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신원조회해서 제출하면 발령받는데 지장이 있을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망신고하라고 듣고 그렇게 해서 무사히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 김계형님의 손자 김00님은 "손자 입장이라 4·3을 직접 겪지는 않았습니다. 직권재심 이야기를 듣고 삼촌과 고향분들에게 묻고 물어서 신고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신지 몰라 생신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예전 서귀포 오일장 자리가 수용소였는데, 할아버지께서 그곳 수용소에서 광주교도소로 갔다가 목포교도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대에도 4·3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고, 4·3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는지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진실 앞에서 4·3 수형인들이 무죄판결이 된다면 이곳이 용서와 화해의 장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 강두배님의 아들 강00님은 아직도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이 기억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6살인가 7살때 새벽에 검은 옷을 입고 총 든 어른들이 와서 아버지를 끌고가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우리 삼촌이 고문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받아서 미아리 공동묘지가서 매장했는데 한국전쟁이 지난 후에 돌아와보니 아버지 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답니다. 외가에서 사용하고있는 가족공동묘지에다 비석만 새겨 아버지 묘소를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망 강정훈님의 손자 강00님은 "이런 자리가 조금 더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할아버지4·3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30대 때 돌아가시다보니 아버지도 나이가 어린시절이라 정확한 내용은 잘 모릅니다. 저희 큰할아버지, 삼촌도 총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때보다 아버지가 많이 힘들게 사셨을 것입니다. 지금와서는 내가 손자이지만 큰할아버지나 삼촌 제사도 모두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삼대를 걸쳐서 너무 힘들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할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망 강희찬님의 사촌동생 강00님은 "사촌형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좀 젊은 사람이 있다 하면 군인들이 와서 젊은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끌고 갔습니다. 사촌형님도 농업학교로 끌려갔다는 얘기가 들리다가 소식이 끊겼는데, 나중에 보니까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다는 얘기도 들리고, 마포형무소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그때 이야기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두 분은 평생 아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로 돌아가셨습니다. 사촌형님이 둘 있었는데, 다른 사촌형님도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 김두만님의 며느리 한00님은 "아버님이 당시에 밭이 있어서 거기서 메밀을 갈았습니다. 아버님이 시어머니께 빨리 내려가라. 나는 죽더라도 4대 독자인 아들은 살려야되지 않겠냐고 하셔서 시어머니는 1살인 아들을 데리고 울면서 내려갔고, 아버님은 산의 큰 소나무 근처에 숨어있었다고 합니다. 이틀이 지나도 아버님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님의 부모님이 찾으러 나갔다가 두 분 다 총을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은 형무소로 끌려갔는데, 같이 있다가 살아서 돌아오신 동료의 말에 의하면 정말 너희 시아버지는 아무 죄 없는 사람인데 대구에 제일 죄인으로 들어와서 고생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없어졌다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죄없는 사람이 15년 수형된게 억울하고 한이 맺혀서 4·3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무죄를 받은 유족 중 한 분께 '무죄판결을 받고 나서 마음이 좀 어떠시냐'고 물어보니, '반은 풀립디다. 반은 남아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70여년간을 참고 삭히셨는데 어떻게 전부 풀리겠습니까. 재판이 원만히 진행되도록 노력할테니, 유족분들이나 유족이 아니신 분들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관심을 가지시고 노력해주시면 풀리지않은 반 중에서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정 부장판사에게 답한 유족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번 무죄판결로 가족을 잃은 슬픔, 연좌제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 억울하다고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없는 그간의 세월에 아주 조금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상처는 제때 치유하지 않으면 흉이 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74년이라는 세월동안 내버려두었던 4·3의 상처는 쉽게 치유할 수 없는 깊은 흉터가 되었습니다. 직권재심 무죄판결로 반은 치유될 수 있었지만, 아직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반을 치유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뤄내야 할 책무일 것입니다.